[역사속 경제리뷰] 디우해전
[역사속 경제리뷰] 디우해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1.07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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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디우해전은 1509년 2월 3일 인도 서북부 디우 지역인 아라비아해에서 포르투칼의 함대와 인도·이슬람 연합함대가 인도양 패권을 놓고 벌인 전투이다. 외형적으로는 연합함대가 포르투칼 함대를 압도했다. 당연히 인도·이슬람 연합함대가 승리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을 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포르투칼 함대가 승리를 하면서 서구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개막을 하게 됐다.

포르투칼의 대항해 항로 개척

포르투칼은 유럽의 서쪽에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바다로 나가면서 인도로 진출하는 항로를 개척했고, 드디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그러나 포르투칼 함대가 경험했던 것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 제독은 4척의 범선과 170여명의 선원으로 이뤄진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했고, 1498년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하면서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됐다.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항에서 받은 대접은 푸대접이었다.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면서 캘리컷항의 통치자인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가져온 유럽 물품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생산한 것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금을 갖고 오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인도는 면화가 풍부하게 공급됐고, 뛰어난 방직과 염색 기술을 자랑하기 때문에 유럽에서 생산한 물품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인도양은 아랍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 상인을 무시한 채 낯선 포르투칼 함대와 교역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굴욕적인 생활을 하다가 겨우 포르투칼로 돌아오는데 중간 기착지인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물품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됐다.

피바다가 된 인도양

1차 원정을 끝낸 바스코 다 가마는 다시 2차 원정을 가게 됐다. 하지만 잘못된 항로로 인해 브라질을 경유해서 다시 인도로 갔다. 하지만 역시 캘리컷항의 자모린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에 포르투칼 함대는 캘리컷항에 교역소를 만들었지만 아랍 상인들과 갈등을 벌이면서 포르투칼인 53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푸르투칼 함대는 캐리컷 항구를 향해 무차별 함포 사격을 벌였고, 결국 적대 관계가 됐다. 1502년 포르투칼은 외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스코 다 가마 4차 원정에 20척의 함대를 꾸려 보냈다. 바스코 다 가마 함대가 인도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포르투칼 함대는 주요 해로를 지키고 있다가 상선이 나타나면 못 지나가게 막은 후 카르타스(Cartaz)라는 통행증을 팔아먹고 돈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아랍 상인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유럽 함대가 나타나서 통행세를 받으려고 하니 어이가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함대는 오노르 항구 초토화, 이슬람 순례선 미리(Miri)호 승객 학살 등을 자행했다. 인도나 아랍국가 입장에서 포르투칼 함대는 괴물이나 다름 없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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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우해전 발발

결국 1509년 2월 3일 인도 서북부 디우 지역에서 인도·이슬람 연합함대와 포르투칼 함대가 맞부딪히는 디우해전이 발발했다. 당시 연합함대는 100여척이었고, 군사만 5천명이었다. 포르투칼은 18척이고 병력은 1700명에 불과했다. 연합함대는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포르투칼 함대가 대승을 했다. 그것은 함포 사격이 비결이었다. 연합함대의 작전은 빠르게 적선에 다가가서 활을 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포르투칼 함대는 함포 사격을 한 것이다. 사흘 동안 전투가 이어졌는데 포르투칼 함대 인명 손실은 30명​, 연합함대는 1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디우해전 이후에도

디우해전 이후 포르투칼은 인도양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것이 유럽으로 빠르게 전파가 되면서 아랍 해군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됐다. 그 대항해 시대는 함포를 앞세워서 시위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개항을 강제적으로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유럽인들은 인도, 아랍 그리고 동아시아도 같은 방법을 통해 개항을 하게 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포르투칼은 초창기에 바다는 장악했을지는 모르지만 인도양에 소속된 육지를 장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포르투칼은 인도양 주변 해안에 석조요새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생활을 했다. 그 밖을 벗어날 경우 원주민들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함포는 인도·아랍 연합군에 비해 우세했다고 하지만 육지에서의 무기는 크게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총이라고 불리는 포르투칼 소총이 있었지만 아랍·인도 연합군은 활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석조 요새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포르투칼은 주로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바다를 장악해서 통행세를 받는 형식의 돈벌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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