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장례 문화
조선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망자가 입던 일상복이나 고급 복식이 출토됐다. 그야말로 화려했다. 조선시대 수의는 망자의 생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었다. 그것은 저승에 가서도 이승 때와 같이 생활하라는 뜻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저승에서는 좀 더 화려한 생활을 하라는 뜻으로 화려한 옷을 입혀서 묻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무덤을 발굴하면 상당히 고급 수의가 발견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삼베는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죄인 된 심정으로 삼베 상복을 입었던 것이다. 거친 촉감의 옷을 입음으로써 부모가 죽은 자식 된 도리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관 역시 화려하다. 꽃상여라고 해서 종이꽃을 사용한다. 종이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이끌고 상여소리를 내면서 행렬이 이어졌고, 다양한 놀이판을 벌였다. 그것은 망자를 조상신으로 승화시키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다같이 이겨낸다는 의미가 있다.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런 장례문화가 크게 바뀌게 된 계기는 1912년 6월 20일 ‘묘지, 화장장, 화장내화장취재규칙’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가족묘지가 아니라 공동묘지 개념이 들어왔다. 그 이전까지는 가족묘지를 이뤄냈는데 이때부터 공동묘지가 도입된 것이다. 물론 일부 가문은 선산이라고 해서 계속 가족묘지를 고수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죽으면 공동묘지에 묻혀야 했다. 1934년 11월 10일 ‘의례준칙’이 제정·공포됐다. 명분은 구습타파와 생활혁신이었는데 본심은 생활의 황민화(일본 문화로 전환), 생활의 합리화, 생활의 임전화(臨戰化 : 전쟁에 임하는)의 3대 강령을 뿌리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934년은 일제가 중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시체제가 내려지는 그런 시점이었다. 물자는 부족했고, 이에 백성들의 과소비를 근절시켜야 했다. 그 과소비 중 하나가 바로 장례문화였다. 조선시대까지 장례는 망자와 살아남은 자의 교감 등으로 화려했지만 이때부터 장례문화는 ‘시신 묻는 절차’만 남은 셈이다.독립군 구분 위해 완장 차고
삼베 수의의 등장이 대표적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망자의 화려한 이승 생활을 기리기 위해서이거나 저승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라는 의미로 화려한 의복을 입혔다. 그리고 각종 장신구 등을 착용하게 했다. 그런데 일제가 물자절약 차원에서 삼베수의를 입히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삼베수의를 망자에 입히는 것이 관례가 됐다. 또 다른 하나는 국화의 사용이다. 국화는 ‘사군자’라고 해서 선비들이 즐기는 꽃이었다. 물론 서양에서 장례식 때 국화를 사용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는 국화를 사군자로 판단했지 망자를 기리는 꽃의 개념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화가 장례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은 순종황제 국장 때부터이다. 그 이유는 국화가 천황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일본 황실을 받들라는 의미가 있다. 또 다른 하나가 상주에게 ‘완장’을 차게 하는 것이다. 상주가 완장을 찬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상주와 독립군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완장을 차게 한 것이다. 이때 생긴 문화 중 하나가 망자를 묶는 문화이다. 조선시대까지 망자를 직접적으로 묶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가 조선인을 죄인 취급해 죄인을 포승줄로 묶듯이 망자를 묶었다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