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허가 판자촌 정리
1960년대 서울시에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농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들이 거주할 곳을 찾지 못하면서 이에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그런데 본격적인 경제개발로 인해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정리를 계획하게 된다.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에게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서 이주를 시킨다는 계획이다. 이주 계획지로 여러 지역이 검토됐지만 남한산성 남쪽에 있는 현재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그리고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조성된 지역에 1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대단지(광주대단지)를 계획하게 된다.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 집을 준다는 말만 믿고 해당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당시 정부는 한 가구 당 20평씩 평당 2천원에 분양을 하고, 입주하고 3년 후부터 분할 상환을 하고, 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해준다는 조건을 걸었다. 10만명의 이주민으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이주를 마다할리 없었다. 이에 이주를 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해당 지역은 도로 포장이 되지 않았고, 남한산성의 영향으로 가파른 경사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이주민들은 한탄을 해야 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장소가 되지 못했다. 사람이 살만한 대지만 마련됐을 뿐 변변한 집 한 채도 없었다. 그냥 땅바닥과 1가구당 군용 텐트 하나만 정부가 지급을 해준 것이다. 땅을 줬으니 집은 알아서 지라는 식이었다. 도로도 없었고, 상하수도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 곳이 못됐다.분노가 폭발
더욱이 정부는 당초 해당 지역에 공장을 짓는다고 공약을 했지만 공장도 없었다.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매일 출퇴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서울로 향하는 버스 노선은 1대였고, 하루에 6차례만 운행을 했다.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지어준다고 하니 부동산 투기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주권을 불법적으로 판매를 했다. 당초 서울 무허가 판자촌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주 계획이었지만 일반 입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절반 정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입주자들은 주택이 올라가고 하면 집값과 땅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비싼 가격에 입주권을 구입했지만 실제로 가본 지역에서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 허탈을 넘어 분노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1971년 6월 경기도청은 해당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토지대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했다. 그런데 당초 약속했던 가격의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에 달했다. 즉, 당초 평당 2천원이었지만 경기도청이 청구한 금액은 평당 8천원~1만 6천원이었다. 이것을 일시불로 납부하라는 고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결국 주민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면서 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특히 일반 입주자들이 처음으로 나섰다. 일반 입주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구입해서 재산 증식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토지 대금부터 당초 계획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도 가세를 하기 시작했다. 8월 10일 성남출장소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5만명이 넘었다. 양태식 서울특별시장과 면담을 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보다 30분 늦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성남출장소를 모조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출동했지만 시위대에 가로막혀 접근도 못했다. 결국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가 현장에 파견해서 이주민들의 화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태식 시장은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항복을 했다. 그리고 성남시로 승격을 했다. 일각에서는 경기동부연합 등 자생적 주사파의 탄생 배경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게기로 성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오늘날의 성남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문화계에서도 해당 사건이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가 있고, 이문열 소설 변경에서도 다뤄지고, 조정래 소설 한강에서도 나타난다. 무엇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광주대단지사건을 자세하게 다뤘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