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배 강화
1755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나고,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됐다. 다만 전쟁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가면서 영국 정부의 부채가 상당히 늘어났다. 이런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1764년 설탕세, 1765년 인지세를 만들었다. 그러자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대거 반발했다. 이에 1766년 영국 정부는 철회를 하게 된다. 다만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영국 의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커지기를 희망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의원(議員)이 들어가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1770년 2월 22일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같은 해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흉흉했다. 그런데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늘어난 부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결국 1773년 봄 세수확대를 위해 홍차법을 제정했고, 미국 식민지에 적용했다. 홍차는 중국에서부터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구에서 영국 식민지로 유통됐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이는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과세를 부과하는 반면 네덜란드는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에서 차를 수입하기 보다는 네덜란드를 통해 직접 수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야만 싼값에 차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이런 과정을 없애버리고자 홍차법을 제정했다. 홍차법은 중국에서 영국 동인도회사로 해서 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차를 유통시키자는 것이었다.밀수업자들의 반발
북미 식민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직접 중구에서 차를 수입해서 영국 식민지로 운송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단계인 네덜란드 밀수업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보다 저렴한 가격에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북미 식민지에 있는 밀수업자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먹거리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빼앗기게 되는 셈이다. 홍차 밀수업자들의 불만이 늘어났는데 이때 북미 식민지 지식인들은 영국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북미 식민지 지식인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좀더 자율권을 얻기를 원했다. 비록 영국 정부로부터 식민지배를 받고 있지만 좀더 자치권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결국 홍차 밀수업자들과 식민지 지식인들이 동인도 회사 소유 무역선을 습격했다. 그리고 중국산 홍차를 바다에 쏟았다. 이같은 소식이 들리면서 북미 전역에서 동인도 회사 무역선을 습격해서 차를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자중하자는 목소리 높아져 영국 정부는 당연히 충격을 받았고, 미국 내에서도 자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홍차 밀수업자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홍차를 더 저렴한 가격에 마시기 위해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들여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독립전쟁에 나섰던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면서 비판을 가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 정부가 입은 손실을 메워주자면서 모금을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영국정부는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 정부를 강제로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기존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통치 방식에서 영국 정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식민 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자 식민지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이에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독립 원하지 않았지만
사실 미국 식민지 지식인들은 독립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영국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받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영국 의회에 자신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집어넣으려고 계획도 했었다. 하지만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자치권을 회수하면서 북미 식민지 지식인들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사실 독립전쟁을 시작할 때에도 이들은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즉, 초창기 독립전쟁의 성격은 영국 의회로부터 독립이었다. 하지만 점차 성격이 영국 정부 자체로부터 독립으로 바뀌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