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석방
[역사속 오늘리뷰] 12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석방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2.20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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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24년 12월 20일은 뮌헨 폭동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석방된 날이다. 뮌헨 폭동으로 히틀러는 전국구 스타가 됐으며, 이때의 정치적 자산을 발판으로 삼아 총통까지 오르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뮌헨 폭동의 실패가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를 독일 전역에 알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만약 뮌헨 폭동이 성공했다면 히틀러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도 궁금하다.

뮌헨 폭동이란

뮌헨 폭동은1923년 11월 8~9일 동안 독일 뮌헨에 있었던 국가 전복 시도 사건이다. 해당 사건으로 히틀러는 지역 극우 정치인에서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를 점령하면서 일종의 롤모델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의 극우세력이나 파시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프랑스 레몽 푸앵카레 정권이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로 해당 지역에 군대를 주둔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프랑스가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당연히 독일 국민들은 분노를 했다. 이는 두 갈래로 현상이 나뉘게 됐다. 하나는 중앙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였다. 또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 극우 세력들이 득세를 하게 됐다. 특히 바이에른 지방은 우파 진영의 근거지였다, 그러다보니 온갖 남부 극우단체들이 결집했다. 그 중에는 나치당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남부 극우단체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된다.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정부를 장악한 후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구상을 하게 됐다. 이에 히틀러는 11월 6일 주요 참모들과 논의를 한 후 쿠데타를 결심했고, 11월 7일 투쟁동맹 지도자회의에 쿠데타 계획을 내놓았고 실행 시기는 11월 8일로 잡았다. 왜냐하면 바에이른 공화국 혁명 5주년이 근교 맥주홀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치당원 동원해서

히틀러는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나치 돌격대의 무장병력들에게 홀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홀 연단에 올라 바에에른 주정부 해산과 과도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내각 수반으로, 루덴도르프를 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등 내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뮌헨의 주요 관공서를 습격했다. 군사령부, 병영, 경찰청 등이 접수됐지만 가장 중요한 통신실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기에 주정부 사람 세 명을 석방시켰다. 바이에른 주정부는 쿠데타 세력의 손아귀에 벗어났고, 통신실을 통해 자유롭게 병력 및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히틀러 세력이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돌격대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히틀러는 끝내 체포됐다.

자고 일어나니 전국구로

이처럼 뮌헨 폭동은 히틀러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지역구 스타가 전국구 스타로 바뀌게 됐다. 남부 극우인사들이 뮌헨 폭동이 실패하자 국외로 망명했지만 히틀러는 체포됐다. 그리고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과 이념을 적극 홍보했다.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국민들에게 상당히 어필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히틀러는 법정에서 뮌헨 폭동을 무능한 의회 통치에 대한 국민적 방어권 행사라고 포장을 했다. 당시 앞서 언급한대로 프랑스에 무능한 독일 정부에 염증을 느꼈던 독일 국민으로서는 히틀러의 법정 연설에 남다른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훗날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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