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보다 석탄에 의존했던 일본제국주의
일본의 석유 침략사는 일제강점기로 들어간다. 당시 일본은 석유보다는 석탄에 상당히 의존을 했었다. 석유가 없어도 에너지원으로 석탄에서 충분히 산업발전을 이뤄냈고, 성장을 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철강, 조선 그리고 석탄 산업에 상당히 집중을 했다.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이 석유에 집중을 하는 동안에도 일본은 석유 없이 석탄으로도 충분히 산업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석유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석유 시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알다시피 일본은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이다.사할린 석유개발권도 갖고 있었지만
사실 일본은 석유 개발권을 갖고 있었다. 바로 사할린이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도 북사할린은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일본군이 사할린 전역을 지배했다. 신생 국가 소련은 사할린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게 양도했다. 사실 소련은 사할린을 일본에게 완전히 양도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사할린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고, 결국 1925년 일본이 북사할린을 반환하고 스스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만약 석유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일본은 스스로 북사할린을 소련에 반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석유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소련에 북사할린이 넘어간 상태였다. 왜냐하면 사할린 유전의 상당수가 북사할린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사할린이 안된다면 만주라도...
북사할린을 소련에게 양도한 일본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유전을 개발해야 했다. 이에 관심을 돌린 곳이 바로 만주이다.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만주에 있는 석유 즉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1936년 푸순 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그러면서 유혈암 처리 시설을 만들고 공장을 대형화했다. 석탄 광산의 부산물로 석유를 얻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채굴량이 점점 줄어들면서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1년에 150만톤의 석유를 석탄에서 뽑아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미쓰이 등의 일본 유명 재벌과 남만주철도 계열기업들이 전부 달라붙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일본제국주의는 다칭유전 시추에 나섰다. 1천미터까지 팠지만 석유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중국이 2천미터를 뚫었는데 석유가 발견됐다. 일본제국주의가 2천미터까지 시추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석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참고적으로 다칭유전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석유 개발에 나섰고, 중국 산업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만큼 매장량이 풍부해서 만약 일본제국주의가 석유 시추에 성공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석유 확보하지 못한 일본
일본은 점차 석유를 확보하지 못하자 초조해졌고, 이에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면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특별하게 석유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이제 인도까지 진출할 결심을 하게 된다. 이에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 조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제국주의는 미국이 자신의 우방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일본에 석유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가장 주력했던 산업 중 하나가 철강산업인데 철강 수출 제한 조치를 내리면서 일본산업은 곤두박질 추락해야 했다. 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일본제국주의는 결국 진주만공습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