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국도2호선 그리고 남한대토벌작전
[역사속 경제리뷰] 국도2호선 그리고 남한대토벌작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12.27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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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한방 한 장면.
KBS 역사스페셜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부산광역시 중구에 이르는 일반 국도를 우리는 ‘국도 2호선’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국도2호선은 해방 이후 만들어진 도로이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벌교, 순천, 광양 등을 거쳐 하동까지 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불렀다. 여기서 ‘폭도(暴徒)’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따르지 않은 불량선인을 말한다. 우리로 이야기하면 의병들을 지칭한다.
KBS 역사스페셜 한 장면.
KBS 역사스페셜 한 장면.

한일병합 전에 남한대토벌작전

남한대토벌작전은 일본제국주의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호남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작전을 의미한다.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호남은 그야말로 ‘반역의 땅’이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의병들이 생겨났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해산된 정규군은 남대문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각 지방으로 내려가서 의병이 됐다. 이때를 정미의병이라고 불렀다.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던 의병들은 일본군에 의해 차례로 격파됐지만 전라도는 일본군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중에 벌교 일대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안규홍이었다. 1908년 일본군의 만행에 못 이겨서 결국 맨손으로 일본군을 때려 죽이게 된다. 이때부터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그만큼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호남은 그야말로 때려잡아야 할 땅이었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 교전 횟수가 전국 전체의 25%를 차지했고, 의병 숫자도 25%였다.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는 한일병합을 하기 전에 호남에 있는 의병들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전라도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남한대토벌작전이 벌어졌다. 이때 의병장 50명을 포함한 4천여명이 체포됐다. 앞서 언급한 안규홍 사례가 있듯이 벌교는 그야말로 반역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그 지역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남성이라면 의병으로 판단해서 무조건 죽이기부터 했다. 행정구역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원래 낙안군에 벌교가 있었지만 낙안군을 폐군했고, 2개 지역으로 나눠 보성과 순천으로 찢어 놓앗다. 그리고 보성은 아예 산업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다.
KBS 역사스페셜 한 장면.
KBS 역사스페셜 한 장면.

의병 포로로 만들어진 도로

일본제국주의가 한일병합을 하고 난 후 가장 큰 고민이 호남의 풍부한 농산물을 일본으로 원활하게 실어나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동에서부터 해남까지의 도로가 필요했다. 그 도로를 바탕으로 목포에서 물자를 실어서 일본으로 보내게 했다. 그 도로를 만든 사람이 남한대토벌작전에서 체포된 의병들이었다. 의병들을 도로 공사에 동원시켰다.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도로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폭도도로(暴徒路面)’라고 불렀다. 물론 현재 도로는 해방 이후 만든 도로이다. 이때 호남에서 근거지를 잃은 의병들은 만주로 연해주로 넘어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가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남한대토벌작전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갔던 의병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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