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참전
6.25전쟁 발발 초기 우리 군은 낙동강까지 밀려가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을 북으로 밀어 올리면서 9.28 서울 수복을 했다. 그리고 10월 1일 3.8선을 넘으면서 북으로 치고 올라갔다.(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된 이유) 우리 군은 삽시간에 북한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됐고, 북한 임시정부는 압록강변에 있는 강계시에 틀어박혔다. 이제 곧 전쟁은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을 하면서 UN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기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에 12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다시 내어주고 삼팔선까지 후퇴를 했다.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과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해상에서 철수하는 흥남철수작전이 이뤄졌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서 중국과 협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이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 공세에 유엔군과 한국군이 맥없이 밀려났다. 결국 1월 3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을 내주게 됐고, 1월 4일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게 됐다.1.4 후퇴 때 이산가족이 많았던 이유
6.25 전쟁을 통틀어 이산가족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가 바로 1.4 후퇴 때이다. 그 이유는 피난을 많이 갔기 때문이다. 이때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울이 텅텅 빈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6.25 전쟁 초반에 서울 점령 됐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14후퇴 때 사람들이 많이 피난 가면서 피난 도중 이산가족이 된 사례가 많다. 1.4후퇴 때 서울시민의 대다수가 피난을 간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6.25전쟁 초반 때만 해도 설마 서울이 점령될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6.25 전쟁 이전에 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전쟁이 일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야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설마 북한군에 밀려서 낙동강까지 방어선이 밀려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서울이 점령된 이후 북한군의 만행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북한군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서울시민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이유는 9.28 서울수복 이후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보도연맹에 소속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도연맹은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좌익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차원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단체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이 이승만 정권을 보도연맹 소속 사람들이 배신하고 북한에 동조할 수도 있다고 해서 대대적인 학살을 한다. 1.4후퇴 당시 서울 시민들이 만약 서울에 남아 있을 경우 훗날 이승만 정권에게 또 다시 보도연맹과 같은 학살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피난을 결심하게 된다.어린이·노약자 제외하고 모두 떠나
1.4후퇴 때 어린이나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을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 또한 피난 과정에서 손을 놓쳐서 이산가족이 된 경우도 발생했다. 훗날 KBS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이산가족들이 나와서 사연을 언급하는데 주로 1.4 후퇴 때 가족들을 잃어버렸다고 답변을 했다. 그만큼 1.4후퇴는 우리의 아픔을 대변하는 사건이다. 워낙 다급하게 피난을 가야했고, 또한 서울을 점령 당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시민 대다수가 피난을 가면서 이산가족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