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땅에서 살 수 없게 된 사람들
1883년 외교사절 8명이 하와이로 간 것이 미국과의 관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1899~1902년까지 약 168명이 정치적 목적으로, 유학생 신분 등으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근대적이면서 공식적인 이민 역사는 1902년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어려움을 처하게 됐다. 내적으로는 가뭄과 홍수로 인해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외적으로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 상인들이 한국시장에 진출하면서 수공업 기반이 무너졌고, 농민들은 파산했다. 이런 가운데 하와이 사탕수수밭 농장주들이 값싸고 일 잘하는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쓰던 중에 중국인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서 일본인 노동자들을 쓰게 됐다. 하지만 역시 일본인들도 파업을 했고, 미국 본토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사탕수수 농장은 급격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겪게 됐다. 이에 주한 미국공사인 알렌에게 부탁을 하게 됐고, 한인 노동자 이민 모집책으로 데쉴러를 선정하게 되면서 동서개발회사를 세우고 전국적인 이민모집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집이 여의치 않으면서 알렌은 인천의 용동감리교회(현재는 내리교회) 목사로 있던 자신의 친구 존스(George Herber Jones) 목사에게 부탁했다. 이에 1차 이민자가 모집됐는데 121명이었다. 이들은 미국 상선 겔릭호를 타고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1월 3일 나가사키 항을 출발해서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사람은 86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트라코마 눈병으로 불합격이 판정을 받으면서 상륙이 거부됐기 때문이다.새로운 삶을 찾아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를 하게 됐다.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와이 이민자들은 그야말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이들은 오전 6시부터 10시간씩 일하고 받는 월급은 16달러였다. 만약 일하지 않으면 감독관이 채찍을 때리기도 했다. 이민을 간 사람들의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남자들이 월등히 많아지면서 한인사회는 골머리를 앓았다. 노총각들이 많다보니 주로 도박이나 술을 마시게 됐고, 사회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결혼이었는데 동양인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에 사진신부가 등장했다. 미국에 있는 남자가 조선땅에 거주하는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 선을 본 후 그 사진을 보고 시집가기를 허락하는 처녀를 데려다가 혼인을 시켰다. 그러면서 가정을 이루게 되고 안정을 찾게 되면서 점차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소득 수준도 높아졌다.하와이 독립운동
하와이 이민자들이 대단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하와이 곳곳에서 자치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1907년에는 총 26개가 됐다. 그리고 한인합성협회가 창설되고, 1909년 미국 본토에 있는 공립협회와 통합하면서 국민회가 됐다. 국민회는 한인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1933년 1월 하와이와 북미에 있던 각각의 국민회가 통합돼 대한인국민회로 개칭됐고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가 설립됐다.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임시정부를 돕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의 부인회도 교육에 힘쓰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자금을 모으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활동가들 가운데는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과 같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중요 인물들도 포함돼 있다. 하와이 교민들은 사탕수수 노동자로 시작해서 정치조직을 만들고 구권회복 운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