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자금사건
한인사회당은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회를 열고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하고 대표를 모스크바 코민테른을 파견해 선진비로 400만 루블을 받아오게 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이르쿠츠크 공산당이 한인들을 중심으로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했다. 한인사회당이 400만 루블을 갖고 이르쿠츠크에 오자 이들이 자금을 탈취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원이었던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는 실질적으로 한인사회당의 정부이면서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심신을 바치겠다면서 한인사회당이 유일한 조선사회주의 당으로 인정했다.2차 자금 탈취 사건
1920년 1월 이동휘는 자신의 측근인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고, 한형권은 1922년까지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 이에 40만 루블만 사해로 가져왔다. 그 이유는 한인사회당 운동자금으로 쓸 것을 협의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다. 임시정부는 이동휘에게 자금관계 경과보고를 요구했지만 이동휘는 이에 불응했다. 그러면서 결국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이같은 일이 발생하면서 결국 한인사회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쫓겨났다. 그러면서 임정 주류세력이 공산당에서 민족주의자로 채워지기 시작했다.이승만 탄핵 사건까지 발생
이런 가운데 임정 개혁파는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의 행보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결국 탄핵이 됐고,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은 구미위원회의 독립자금을 임정에 보내는 것을 끊어버렸다. 결국 구미위원회로부터도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을 당하면서 구미위원회가 해체됐다. 이로써 임정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할 방도가 사라지게 되면서 한동안 재정난에 휩싸이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