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13일 민족일보 창간
[역사속 오늘리뷰] 2월 13일 민족일보 창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2.13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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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이후 이른바 군사혁명재판에 회부된 민족일보 관계자들./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16 쿠데타 이후 이른바 군사혁명재판에 회부된 민족일보 관계자들./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1년 2월 13일은 민족일보 창간일이다. 1961년 5월 19일까지 발행됐던 진보 성향 일간지로, 발행인은 조용수였고, 논설위원은 송지영, 양호민이었다. 불과 3개월 밖에 발행을 못했지만 당시 경향신문이 8만부가 넘었는데 민족일보가 4만부를 넘겼다. 그만큼 국민적 관심이 쏠렸던 일간지였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눈에는 민족일보가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결국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 집행까지 받았다.

이승만 하야 그리고 진보 진영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1960년 5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에 진보 세력은 원내 진출을 꿈꾸며 후보를 내기 시작했다. 조용수 역시 경상북도 청송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입후보자 8명 중 3위로 낙선했다. 사회대중당이 원내 4석에 그쳤고 민주당 일당독주체제가 허용됐고,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진보 진영은 그나마 자유당보다는 보다 민주적인 정권 운용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반공법 강화, 데모규제법 등 자유당 정권을 연상시키는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면서 진보 진영에도 언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에 망명정객 이영근을 통해 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이날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창간 준비 당시 ‘대중일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민족일보’로 이름을 바꿔 등록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당으로부터 ‘조총련의 자금을 조달 받아 만들어졌다’는 색깔론 공세를 받아야 했다. 이에 국무원 사무처가 민족일보를 인쇄하고 있는 서울신문에 대해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중지하라는 통고를 했다. 이에 3일간 휴간을 한 일도 있었다. 민족일보 측은 언론탄압이라면서 손해배상 소송과 국제신문인협회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신문 논조를 살펴보면 북한을 ‘북괴’라고 지칭하고, 김일성을 흐루쇼프 꼭두각시로 묘사하는 등 반공주의를 철저히 따랐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런데 그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조용수는 박정희가 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했던 전력을 내세우면서 5월 17일자 사설에서 “자유진영 우방국가들은 이 군사혁명의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지원을 베풀어주기를 바란다”면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설을 올렸다. 하지만 군부는 민족일보 이사진 13명을 반공법 7조의 ‘북한을 찬양·고무한 혐의’로 구속했고, 군사재판에 넘겼다. 일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꺼낸 것이 오히려 박정희를 자극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5월 19일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선고를 내렸고, 10월 31일 최종공판에서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송지영과 안신규는 무기징역을 받았고, 조용수는 사형집행됐다. 1961년 9월 공보부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동아일보가 23만 3천774부, 한국일보가 17만 4천565부, 조선일보 13만 3천368부, 경향신문이 8만 185부였다. 그리고 민족일보가 4만 532부를 발행했다. 창간 첫해에 민족일보가 4만여부가 팔려 나갔다는 것은 민족일보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지를 짐작하고 남는다. 조용수가 사형 집행을 당하면서 이른바 ‘민족일보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 필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일보 사건은 지난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로부터 명예를 회복 받았고,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회창의 회환

조용수 1심 판결 당시 배석판사 중 한명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 TV 정견 발표회에서 당시 시민운동을 대표해서 패널로 참석했던 박원순 변호사가 민족일보 사건을 언급하자 이 후보는 “당시 서울지법 판사 중에서 연소자 순으로 뽑혀 혁명재판부에 말석으로 참여했을 뿐이다”면서 “나는 이런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35년여 판사 생활 중 가장 생각나고 아쉬운 재판”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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