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추진
3S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스포츠를 꼽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1988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을 했다. 그리고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 민속씨름, 농구대잔치 등이 열렸다. 그야말로 스포츠 대잔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1년 영화 상영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면서 무분별한 저예산 에로 영화가 영화관에서 집중적으로 늘어났다. 그 유명한 것이 1982년 2월 애마부인이다. 아울러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되면서 여러 가지 성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술집, 모텔, 유흥업소 등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면서 조폭과 유흥업이 연계되면서 조폭들의 몸집이 커지면서 전국구화 됐다.3S 정책의 실체
3S 정책에 대해 실체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당시에도 3S 정책이라고 구체적인 정책을 구사한 문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이후 훗날에 ‘3S 정책’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3S 정책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검열 등에 반발해서 표출된 대중문화의 욕망 분출이라는 이야기다. 스포츠는 전두환 정권이 직접 개입해서 추진했기 때문에 국민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크린 등은 다른 이유 때문에 분출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당시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인해 대중예술계가 급격히 위축됐다. 가요계의 경우 거물급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 등으로 가요계에 은퇴를 해야 했다. 극장이나 방송에서도 정권을 찬양하는 등의 내용을 방영해야 하는 등 그야말로 대중문화의 암흑기가 도래했다.칼라TV 등의 보급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칼라TV가 보급되고, 박정희 정권 때의 긴급조치 9호 등이 해제되면서 대중문화의 창작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에도 여전히 검열과 규제가 심했다. 박정희 정권 때에 비하면 다소 완화됐지만 여전히 검열과 규제가 심하면서 만화 검열제도 존재했고, 노래 검열도 잔존했다. 방송과 출판 역시 검열은 여전히 이뤄졌다. 이런 이유로 특정한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되는 등이 사건이 나타났다. 아울러 개그에서는 ‘대머리’ 혹은 ‘주걱턱’ 등을 소재로 삼을 수 없었으며 ‘순자’라는 이름도 내세울 수 없었다. 방미의 ‘올 가을엔 사랑 할거야’ 노래는 원래 1979년 드라마 ‘순자의 계절’ OST로 심수봉이 불렀었다. 하지만 ‘순자’라는 이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고, 결국 가수 방미가 ‘올 가을엔 사랑 할거야’로 노래 제목을 바꿔서 발표했다. 여기에 뉴스 등에서는 이른바 ‘땡전뉴스’로 대변되는 전두환과 이순자 도정 소식 등이 이뤄졌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스포츠, 스크린 등 3S였다. 전두환이 야심차게 추진했다고 하기 보다는 당시 사회적인 현상으로 대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경제적 성장, 그리고 3S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성장과 맞물린다. 1980년대 3저 현상으로 인해 경제적 성장이 이뤄지면서 중산층이 당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검열과 규제가 극심하다고 해도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수의 국민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열심히 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3저 현상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은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것이 문화적인 관심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다보니 스포츠나 스크린 등의 산업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스포츠와 스크린 등 대중문화의 성장은 곧 검열과 규제 등의 해제 요구로 이어졌고, 이것이 민주주의 요구로 폭발하면서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