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고래잡이
[역사속 경제리뷰] 고래잡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2.15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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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고래잡이는 현재에는 금지가 됐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고래잡이는 역사적으로 오래됐다. 이는 동굴벽화에서도 고래 그림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는 고래기름, 고래고기, 고래수염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서양에서 고래잡이는 고래고기와 코르셋에 들어가는 고래수염 때문이지만 동양권인 우리나라에는 고래고기도 고래잡이 이유 중에 포함돼 있다.

반구대 암각화서부터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사냥했다는 것을 알 수 잇다. 그리고 경주시 서봉총에서도 1천500년 전 신라 지배층이 고래고기를 요리해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고래기름 등 부산물을 유통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래잡이가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불교문화가 중심을 이뤘고, 조선시대 때에는 수탈 문제 등이 있었다. 고래를 만약 잡는다고 해도 주로 기득권층에서 그 혜택을 누렸을 뿐이지 백성들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이유로 죽은 고래가 바닷가에 떠내려 왔다면 어민들은 도로 바다에 갖다 버리기도 했다. 만약 관청이 죽은 고래를 먼저 발견한다면 어민들은 그야말로 생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관청이 먼저 알기 전에 바다에 죽은 고래를 버려야 했다.

고래잡이 본격화는 서구열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가 본격화된 것은 오히려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 열강이 밀려들어오면서이다. 근대적인 포경사업을 제안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1882년 일본에 수신사 일원으로 따라갔던 김옥균은 나가사키에서 일본 포경 산업을 보고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및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하게 됐다. 김옥균이 이 같은 직책을 맡은 것은 근대화 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려고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 세력이 축출됐다. 이후 조선 포경업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된 이후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포경업은 일본인들이 독점을 하게 됐다. 포경선 선적은 모두 일본에 있었고, 단지 조선의 항구에서 출어를 할 뿐이었다. 즉, 조선 포경선은 아예 없었다.

해방 이후

해방이 된 이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경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영세했다. 이후 포경선 척수도 감소하면서 더 이상 포경선 건조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경업에 뛰어든 것은 일본으로서의 수출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 일본은 한국산 고래를 상당히 좋아하면서 인기가 있었다. 이후 포경산업은 점차 사양산업이 됐다. 고래잡이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판 여론 등으로 인해 사양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고래잡이 금지를 하게 됐고, 고래가 우연히 혼획된다면 불법포경인지 여부를 해경의 조사를 받은 후 울산의 고래고기 식당에 내보낼 정도가 됐다. 현재에도 매년 2천여 마리 정도가 혼획될 정도이다. 다만 울산광역시 등에서는 고래를 컨셉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었고, 울산고래축제를 매년 기획하고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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