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당백전
[역사속 경제리뷰] 당백전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2.22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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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당백전은 조선시대 고종 시절 발행한 화폐이다. ‘호대당백(戶大當百)’이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해당 화폐는 호조(戶曹)에서 주조하였으며, 다른 화폐의 100배 값어치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초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하면서 부작용만 속출하게 됐다. 이로 이해 결국 2년만에 폐지해야 했을 정도이다. 오늘날 화폐와 인플레이션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백전의 폐단에 대해 깊게 새겨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 화폐 역사상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면포 가격 폭락

조선시대 후기 들어서면서 상평통보가 유통이 되기는 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쌀’과 ‘면포’가 화폐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들어서면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면포의 대량생산이 이뤄지게 됐다. 조선이 아무리 쇄국정책을 구사했다고 하지만 영국산 면포가 대량으로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면포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지게 됐다. 면포가 감당했던 통화량을 화폐 발행으로 대체해야 했고, 고액권 화폐가 필요하게 됐다. 문제는 조선은 고액권을 발행할 능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구리가 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좌의정 김병학이 당백전을 제안했다.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면서 노동력과 재원을 많이 투입해야 하면서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당백전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당백전의 명목상 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했지만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8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정부로서는 당백전을 발행할 때마다 이익이 됐다. 하지만 시장에는 고액권 화폐가 풀리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액면가 아닌 ‘물질적 가치’

조선시대에서 화폐는 ‘액면가’를 가치에 두고 유통을 한게 아니었다. 예컨대 상평통보 안에 구리가 얼마나 들어갔느냐를 두고 가치를 따졌다. 문제는 당백전은 명목상 100배이지만 실제로 구리 함량은 상평통보의 몇 배 수준이었다. 따라서 당백전을 거래하면 할수록 상인들 입장에서는 손해를 봐야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재정이 튼튼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즉, 정부는 당백전을 주조하고, 그것을 액면가로 상인에게 넘기면 상인은 액면가에 해당하는 상평통보 100개를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 하지만 상인은 다시 당백전을 다른 상인에게 넘길 때에는 구리 함량을 따지게 되면서 실제로 5배 정도, 많아야 8배 정도의 가치로 넘겨야 했다. 즉, 상인은 당백전을 취급하면 취급할수록 손해를 보게 된 셈이다. 결국 화폐 가치는 떨어지게 되면서 물가는 오르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다. 물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당백전에 해당하는 귀금속을 확보해야 하는데 당시 금광 개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실상 속수무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위조화폐도 주조되면서 당백전의 시중 유통은 그야말로 엄청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1867년 4월 주조를 중단하고 회수했고, 유통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백성들의 경제는 궁핍해지면서 조정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됐다. 당백전은 조선 경제를 철저하게 박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 인해 조선 재정도 바닥을 보이게 됐다. 이것의 여파는 임오군란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종속이 되면서 결국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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