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내세웠지만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핵심 교리로 정착됐다. 하지만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파의 기세는 더욱 극렬해져갔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제국은 분할되면서 콘스탄스, 턴스탄티우스 2세 형제가 각각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로 분열됐다. 제국의 분열이 가속화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 되면서 로마 제국은 더욱 위협을 받게 됐다. 이에 로마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됐고, 이에 니케아파를 받드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됐다.결국 로마 황제 아래에서
테살로니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니케아 공의회 주관 아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정된 상태였다. 테살로니카 칙령은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는 로마의 분열을 종교적 통합을 통해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고 싶은 황제의 욕심이 들어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살로니카 칙령은 ‘이단’에게는 가혹하고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황제 입장에서 이단은 기독교를 해치는 근원이지만 이교도는 ‘개종’의 대상이 됐었던 것이다. 이는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관련이 깊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 땅에 게르만족들이 살게 되면서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해야 했고, 기독교 전파를 통해 ‘하나의 로마’를 꿈꿨다. 이런 이유로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거꾸로 기독교인이지만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면 그것은 ‘하나의 로마’가 아니라 분열의 로마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로서도 용납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단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탄압이 극심했다. 이런 테살로니카 칙령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교도’에게는 관대한 반면 ‘이단’에게는 가혹하게 만드는 기독교의 전통이 된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