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은 신민지 처리와 관련해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면서 패전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됐다. 이에 우리 민족대표들 역시 우리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에 들어가게 됐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에 일본이 끼어있었다는 점에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 훗날 역사가들의 평가다. 또한 그해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전국민이 비통해 하는 가운데 일제가 고종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족운동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에 고종 황제 장례일인 3월 3일 이틀 전인 3월 1일 정오를 거사의 개시일로 정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결국 학생들이 주도가 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게 됐고, 시가행진을 했다. 그 이후 3월 10일을 중심으로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에 확산돼 갔다. 다만 독립선언문에 농촌 문제가 지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농촌 지역에서는 도심지역보다 오히려 극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농촌지역에서 극렬하게 만세운동 전개된 이유
농촌지역에서 극렬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된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부터 1928년까지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 조사사업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 토지의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토지 사유권 개념이 점차 백성들에게도 인식하게 되면서 토지의 자유로운 거래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등기제도 등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점유하려고 했지만 토지를 점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토지 사유권 이외에 다른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토지 사유권 이외에도 토지에는 여러 가지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토지의 경작권이다. 즉, 농부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해당 토지에 대한 경작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토지 주인이 그 경작권을 마음대로 빼앗아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로서는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경작권도 토지 주인이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토지 사유권 이외의 권리는 일체 인정하지 않게 됐다.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된 이후
토지 사유권 이외에 토지의 다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 농촌 사회의 붕괴를 의미한다. 농부들은 그동안 자신이 대대로 경작해왔던 토지의 경작권이 빼앗기면서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소작농도 될 수 없게 되면 그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떠도는 신세가 돼야 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면서 농촌사회는 붕괴됐다. 소작농이 속출했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농부들이 늘어났다. 그들로서는 3.1운동은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3.1운동이 도심보다 농촌지역에서 더욱 극렬히 전개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