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집약적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은 ‘느닷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뜬금없는’ 기자회견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중화학공업을 아예 육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1980년까지 100억불 수출액, 1000불 국민소득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는 1972년 수출액이 18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32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이미 포항제철(현 포스코) 등 중화학공업에 이미 상당한 투자를 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중화학공업 육성이 ‘느닷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뜬금없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그 이유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한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한 위험한 도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노동집약적 경공업으로 경제구조를 완성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경제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0월 유신 체제, 경제적 변화 요구
이는 10월 유신 체제로 인한 정치적 불만을 경제로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박정희 정권이 안게 됐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만을 경제성장으로 돌려서 해소를 한다는 것 때문에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갖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은 결국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임금 노동자의 희생으로만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그것이 정치적 불만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박정희 정권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1979년 부마항쟁에는 노동집약적 산업의 한계에 부딪힌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항거라는 평가도 있다.대만의 UN자진 탈퇴에 충격 받아
이와 더불어 1971년 대만이 유엔 자진 탈퇴를 선언한 것이 충격을 줬을 것으로 훗날 역사가들은 평가를 하고 있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가 알바니아 대표에 의해 발의됐고, 가결됐다. 핵심 내용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정부는 중화민국(대만)이 갖고 있던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 상실 대신 중화민국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이중 대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하지만 유엔은 격론 끝에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가 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 불참 3표로 통과됐다. 결국 대만은 자진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강제축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졌고, 미국이 주대만미군 주둔 규모를 급격히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대만의 유엔 탈퇴는 큰 충격이었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중화학공업’이었다. 왜냐하면 노동집약적 경공업은 어느 나라이든 대체가 가능하지만 중화학공업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자는 판단을 한 것으로 후대 역사가들은 평가를 하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