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는 가히 난을 피할 만합니다
지금의 강화와는 달라
다만 당시 강화는 지금의 강화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경에 있던 백성들이 몰려오면서 이를 간척해서 개경 백성 모두가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야 했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는 것은 물론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간척사업이 벌어졌다. 지금의 강화평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평야였다. 현재 강화도는 동서 길이 12km, 남북으로 28km를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이런 곳에 갑작스럽게 개경 백성 수십만명이 몰려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땅이 비좁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간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처가가 맞닿을 정도였고, 그로 인해 강화에 불이 나면 수천호의 집이 불에 탔다’는 기록이 있다.주요 역사에 등장하는 강화도
강화도는 당시 간척사업에 수많은 백성들이 투입되면서 고통을 받았지만 그 이후부터 풍요의 땅이 됐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천도할 생각을 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워낙 빨리 남하를 하면서 강화도로 천도를 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결국 삼전도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리고 개화기 때에는 강화도 조약을 맺을 정도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지역이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