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2일 삼성상회 개업
[역사속 오늘리뷰] 3월 22일 삼성상회 개업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3.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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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8년 3월 22일은 삼성상회 개업일이다. 이병철 회장이 대구를 연고로 해서 세운 기업이면서 오늘날 삼성그룹의 전신이다. 특히 삼성물산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삼성상회가 대구에서 개업을 한 것은 이병철 회장의 연고지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구가 갖는 당시의 경제적 의미 때문이다. ‘물류’를 일찌감치 간파했던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 정착해서 삼성상회를 성장시켰고, 삼성물산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사진=연합뉴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사진=연합뉴스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차려

이병철 회장은 26세 때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차렸다. 우여곡절 끝에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비상조치를 내리게 됐고, 결국 이병철 회장은 정미소와 운수회사를 남에게 넘기면서 모든 부채를 청산했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반년 만에 대구로 돌아와서 ‘삼성상회’를 차렸다. 당시 대구 서문시장 수동에 자리를 잡고 250평 점포를 사서 삼성상회 간판을 내걸었다. 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이고,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 당시 경북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동해안에서 잡힌 건어물 등을 중국에 수출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구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주양조장 ‘조선양조’를 인수하면서 대구에서 굴지의 납세자가 됐다.
사문진 주막촌./사진=대구시
사문진 주막촌./사진=대구시

왜 하필 대구인가

사실 대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경상도에서 경주, 상주, 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아마도 조선시대 때 경주나 진주 혹은 상주보다 큰 도시였다면 오늘날 ‘경상도’(경주+상주)가 아닌 ‘대상도’ 혹은 ‘대경도’로 불리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는 경주나 상주, 진주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서라벌이었다는 이유로 인구가 상당히 많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옆이 바다이기 때문에 물자가 풍부했다. 상주의 경우에는 영남의 ‘낙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거부터 물자가 풍부한 도시였다. 진주의 경우 경상도와 전라도 중간 지역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경상도 물자와 전라고 물자가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대구는 그에 비하면 분지 형태였기 때문에 넓은 평야를 보유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교통의 요충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요 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사문진이었다. 사문진은 조선시대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충지였다. 금호강은 경북 포항시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사문진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대구를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개화기를 지나면서 낙동강이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인 물자 수송로가 됐다. 그러면서 사문진이 번성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개화기부터 시작한 경부선 철도 부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뤄지면서 대구역이 생겨났다. 이에 낙동강 수운의 사문진과 철도의 대구역이 합쳐지면서 대구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면서 경북 지역의 청과물과 동해안의 건어물 등이 대구로 몰리게 되면서 이병철 회장 입장에서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개업을 하게 된 것이다. 경북 포항 등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건어물을 금호강을 통해서 사문진으로 몰리게 되고, 충청도, 강원도, 경남 등지에서 산출된 청과물이 사문진으로 몰리게 된다. 대구로 물자가 몰리게 되는 것이다. 삼성상회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중국에 수출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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