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로 유명해지면서 20대 초반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1501년 8월 16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는 미켈란젤로에게 성당의 북쪽 위에 있는 부벽에 올려놓을 다윗을 조각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상을 만들면서 메디치 가문을 물리친 피렌체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504년 다비드상이 완성됐다. 문제는 5m가 넘는 거대한 다비드상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울러 다비드상이 완성됐다는 소식에 세간의 사람들이 다비드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당 부벽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피렌체 시민 30인 위원회를 소집했고, 그 결과 다비드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메디치 가문 지원 받은 미켈란젤로가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의 후원자였다. 그런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다비드상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미켈란젤로의 아이어리가 발생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부터 의뢰를 받았을 당시 논란에 대한 값까지 피렌체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복귀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고향을 밟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교황청의 의뢰만 받으면서 숨어 지내야 했다. 피렌체를 회복한 메디치 가문은 다비드상의 거취에 대해 논의를 했지만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차마 파괴를 할 수 없었다. 다만 메디치 가문을 찬양하는 새로운 작품을 의뢰했다. 해당 작품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로, 이 청동상에서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피렌체 공화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