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통일신라 김태렴의 일본 여왕 사기사건
[역사속 경제리뷰] 통일신라 김태렴의 일본 여왕 사기사건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4.03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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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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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8세기 통일신라 당시 일본에는 여왕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서 왕자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와서는 조공을 한다면서 각종 물품을 판매했다. 이는 일본 역사서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이 없다. 이를 두고 일본 역사학계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의견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기꾼’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역사학계에서는 한때는 ‘통일신라 왕자’가 맞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일본에 온 대규모 사절단

통일신라 왕자 ‘김태렴’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는 없다. 하지만 ‘속일본기(続法国紀)’에 등장한다. 725년 일본 쿠슈 다자이후(太宰府)에 신라 사절단이 도착한다. 그 규모는 700명 정도였는데 대표는 ‘김태렴’이라는 통일신라 왕자였다. 이후 일본 여왕인 코켄 덴노를 알현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태렴이 일본 여왕에게 통일신라의 국왕인 경덕왕이 말을 전한다고 했다. 그 내용은 일본 여왕을 ‘천왕’이라고 표현했으며 신라국이 예로부터 일본을 받들어 왔기에 경덕왕이 몸소 조공하고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국왕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기 때문에 왕자 한아찬 태렴을 우두머리로 해서 370여명을 거느리고 ‘입조(入朝)’하고 특산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백제 멸망 당시 백제를 지원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통일신라와의 관계가 서먹해져있었다. 이에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입국이 불허된 상태였는데 신라 왕자라는 사람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하겠다고 했으니 일본 측에서는 대환영할 일이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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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서 원했지만

김태렴은 코켄 덴노를 당나라 황제와 동급으로 만들면서 아부했다. 이에 일본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김태렴이 가져온 물건은 귀족들이 앞다퉈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해당 문서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로 남아있다. 김태렴은 그야말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엄청난 대접을 받았고, 김태렴이 귀족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신라로 돌아갔다. 그때 일본 여왕은 김태렴에게 ‘신라 국왕이 직접 일본 조정을 방문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사람을 보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에도 신리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수상히 여겼고, 결국 일본이 먼저 사절을 파견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753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만나주지 않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사기꾼이었을까

사실 김태렴이라는 사람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752년 경덕왕에는 왕자가 없었다. 더욱이 만약 경덕왕이 왕자가 있어도 당시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건장한 청년의 왕자가 있을리 만무했다. 이런 이유로 김태렴은 신라 왕자를 사칭한 장사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기꾼이 700여명의 사절단을 꾸려서 온다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갖고 온 품목 역시 왕자의 신분이 아니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품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왕자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해왔었다. 그러나 당시 통일신라가 중앙집권국가에서 점차 지방 호족들이 득세를 해가는 상황이고, 당시 중앙에서는 계속해서 왕위계승 문제가 불거진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700여명의 대규모 사기꾼 사절단을 꾸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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