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코리아 게이트 발발로
미국의 도감청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코리아 게이트였다. 1976년 우리나라와 미국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바로 코리아 게이트이다.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WP)는 1면에 “서울이 미국 관리에게 수백만 달러를 줬다(Seoul Gave Millions to U.S. Officials)”는 보도를 했다. 미국 정치권 내에서 박정희 정부의 인권 탄압을 방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보도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박동선이라는 인물이 우리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90여 명의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에게 전달하는 매수공작을 벌였다는 내용이 코리아 게이트였다. 이로 인해 프레이저 위원회가 열리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등 그야말로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코리아 게이트가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코리아 게이트, 새로운 국면으로
이같은 코리아 게이트가 발발한 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1977년 6월말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호을 보도했다. CIA가 도청을 통해 박정희 당시 한국 대통령이 박동선씨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 외무부는 주한 미국 대사를 초지해 기사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미국 대사는 즉석에서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윌리엄 포터 전 주한 미국대사가 CBS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도청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갈등은 재현됐다. 한미관계가 그야말로 꼬일 대로 꼬였다. 여기에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한미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결국 한미관계가 꼬이게 되면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10.26 사건이 발발하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