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진압 위해
다급해진 이홍장
청국 이홍장은 이를 수습하려고 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전쟁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청나라에게는 상당히 힘든 시기가 됐다. 그런데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가던 중 일본 청년이 쏜 총알이 왼쪽 뺨을 스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됐다. 일본은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 해 은화 3억냥의 배상금을 2억냥으로 줄이고,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량으로 합의를 한 것이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영향력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친일 내각 수립을 할 수 있게 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이홍장은 제3국에 호소를 하기 시작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불평등한 조약으로 일본 세력의 확장은 동아시아 평화는 물론 전세계 평화도 깨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 호소가 먹혀들어갔는지 러시아 제국, 프랑ㅅ, 독일 제국은 삼국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는 상황이 전개됐다.러시아 제국의 파워 느끼고
이에 조선 조정은 러시아 제국의 힘을 느끼게 되면서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에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간의 공조를 논의했다.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일본은 결국 낭인들을 불러들여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고종으로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그리고 1년 후 러시아의 신변 보호 하에 다시 궁궐로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