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광복 앞두고 황태성은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으로 활동을 했다가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활동을 했다.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상희와 계속 교류를 이어갔다.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박상희가 경찰에 의해 사살 당하자 황태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입당 때 신원보증을 한 후 월북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차관급인 무역성 부상까지 맡는 등 고위 간부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5.16 쿠다테가 터지고 박정희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자 북한은 박 전 대통령을 호의적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박 전 대통령이 황태성에 의해 남로당에 가입을 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육군 첩보부대의 제의로 정치회담을 제안하자 북한은 이를 수용하고 양측에서 촬영한 영화 필름을 교환하면서 북한은 박 전 대통령을 ‘대화해 볼만한 존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사람으로 황태성이 결정됐다. 그리고 1961년 8월말 남파돼 서울에 잠입했다. 황태성은 박 전 대통령과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던 중 박 전 대통령의 대구고등사범 후배 김민하를 만나서 박 전 대통령과 김종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은 서울에 살고 있던 조카딸인 황유경과 조카사위 권상능을 만났고, 권상능은 김조일의 장모인 조귀분에게 전달했고, 조귀분은 사위인 김종필에서 황태성의 남파 사실을 알렸다. 결국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게 체포됐다.북한에서 온 밀사?
황태성은 줄곧 자신이 북한에서 온 밀사라고 주장했지만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밀사가 아닌 간첩으로 여겼다. 더욱이 미국에서는 황태성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과거에 대해 예의주시를 하게 되자 박 전 대통령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됐다. 결국 1961년 12월 27일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접촉한 김민하와 권능상은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황태성은 이 판결에 항의해 자신은 밀사로 왔다는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항소했다. 황태성 사건은 결국 박 전 대통령의 레드 콤플렉스를 건드렸고, 정치적 경쟁자인 윤보선 야당 후보는 황태성 사건을 언급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공격했다. 황태성 사건 이전까지 박 전 대통령에 우호적인 시각을 보였던 북한이 갑작스럽게 적대적으로 변화하면서 박정희 정권 내내 남북관계는 얼어붙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