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이승만 정권 당시 수립된 프로젝트였지만 4.19 혁명이 발발하면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계획은 철회가 됐다.
그리고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됐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역시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좌초될 위기에 봉착했지만 박정희 군부는 결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받아들여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광복 이후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에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대규모 원조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 역시 미국 원조에 의존한 경제체제로 전환된다.
이에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데 민수공업품의 자급자족, 수출공업 진흥, 중공업 육성 등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해 일제의 파행적 경제 구조 청산 및 전력원의 적극적 개발 추진, 원조 등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조합물동계획 등을 수립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트루먼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유엔은 대한(對韓) 민간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국제연합 주한민사처(UNCACK)와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을 설립했다.
이어 미국과 UN은 쉽게 통일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따른 경제 원조 등을 고민하게 된다.
이에 1952년 5월 UN군 사령부와 대한민국은 한국에 대한 실태 파악 및 원조 제공을 위해,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이른바 마이어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휴전 이후를 가정하에 각종 경제 원조 등과 경제 재건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에 UN의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위촉으로서 미국 Nathan 협회에서 작성한 제1차 경제부흥 5개년 계획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53년 4월 미국 Tasca 사절단이 발표한 한국의 재정적자 보전과 종합경제부흥3개년계획안 등이 이어졌다.
경제부흥5개년 계획, 이승만 반대로
이후 기획처는 경제부흥5개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경제부흥 5개년 계획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당시 부흥부 기획과장 이기홍의 회고에 자세한 사항이 나와 있다. 이기홍은 인도의 5개년계획을 연구하면서 1956년부터 한국의 5개년계획 초안을 작성했고, 해당 계획안은 1957년 부흥부 김현철 장관을 단장으로 해서 김일환 상공, 인태식 재무, 정운갑 농림 등 경제4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57년 11월 브리핑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스탈린식 사고방식’이라고 질책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 생존 시에는 5개년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확인하고 한국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USOM-Koera의 재정경제고문에게 장기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5개년 계획 대신 3개년 계획 등이 부각됐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진 3개년 계획은 1959년 국무회의에서 통과됐지만 실행도 해보기도 전에 4.19 혁명이 발발하면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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