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의 신분
흔히 노비라고 하면 서양의 노예와 비교를 하는데 노비와 노예의 신분은 확실하게 달랐다. 노비는 천민이지만 ‘사람’으로 인정했고, 나라의 백성으로 인식했다. 다만 노비는 ‘군역’과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지만 재산권이 법적으로 보장받았으며, 재산을 매매하고 상속하며 양도를 할 수 있었다. 역모와 강상죄 외의 이유로 '자기 주인‘ 을 고소하는게 금지되었을 뿐, 남의 주인을 고소하거나 민사 소송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없어 다른 자유민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있었다. 물론 노비들은 이런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주종간의 갑을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 노예와 같이 인격적으로 완전히 무시되고, 동물 취급 받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서양의 노예와는 확연히 다르다.자발적 노비로
노비가 조선시대 초기부터 꾸준하게 증가를 했지만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은 숙종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숙종 시기인 17세기에는 조선시대 인구의 30~40% 정도가 노비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의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하고, 많은 경우 73%를 기록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형적인 노비의 비율이다. 이런 노비의 증가에 대해 일각에서는 경신대기근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경신대기근은 경술년과 신해년 즉, 1670년과 1671년에 발생한 대기근을 말한다. 경신대기근은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강력한 태풍의 접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서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 이듬해까지 지속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가 됐다. 오죽하면 조선 백성들이 “차라리 임진왜란이 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의 인구가 대폭 감소가 될 정도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당연히 양인들은 군역이나 세금 납부를 피하고 싶어했다. 그 방법으로는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거나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즉,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를 협호(挾戶)라고 부른다. 주인에게 예속돼 있지만 사실상 주인에게 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노비가 증가하면서 조선 조정으로서도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노비 숫자를 줄이는 것이 조선 조정의 가장 큰 숙제였다. 특정 마을의 노비의 비율이 50%나 됐다는 것은 그 마을에 있었던 양인들이 자발적으로 노비가 된 사례라는 해석이 나온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