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쓰시마(대마도)는 우리와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섬이다. 이에 우리나라 영토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쓰시마는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와 가깝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여러차례 정벌을 나갔지만 우리 영토로 편입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
쓰시마 정벌
쓰시마 정벌은 우리 역사에서 3차례가 있었다. 1차는 고려말 창왕 2년인 1389년, 2차는 태조 5년 1396년, 3차는 세종 1년 1419년이다.
흔히 쓰시마 정벌이라고 하면 3차를 지칭한다. 쓰시마 정벌을 한 이유는 왜구를 격퇴시키려는 것도 있었지만 명나라에 조선의 왜구에 대한 방어는 조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도 왜구의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원나라 당시 여몽연합군이 쓰시마 정벌을 하려고 했다가 패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스스로 왜구에 대한 방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명나라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왜구의 본거지를 침공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왜구들의 침략을 감쇄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실제로 3차 정벌 이후 왜구의 수가 격감했다.
쓰시마 정벌의 경험은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주가 중립적 외교를 펼치려고 했던 것과 연결돼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섬 영주는 조선의 신하이면서 막부의 다이묘라는 두 직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 나갔다.
1861년 러시아 제국이 통상조약과 개항을 요구하면서 쓰시마섬을 점령했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최익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돼 유배를 갔던 곳이 쓰시마 섬이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를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섬으로 선포를 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승만, 대마도 영유권 주장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반환 요구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했기 때문에 대마도는 반환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배를 해왔기 때문에 논리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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