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그해 1월 14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이다. 그 다음날인 15일 최초로 보도했고, 이에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취재에 들어갔다. 이때 치안본부 강민창은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밝혔고, 이것이 언론을 통해 발표됐다. 박종철 사망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은 박종철 사건을 부검해야 한다고 밀어붙였고, 결국 부검 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경부 압박 질식사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또한 박종철군 사망을 처음 확인한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에 의해 고문이 일어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자신이 대공분실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청진기 진단 결과 복부 등 몸속에 물소리가 났다고 훗날 진술했다.수뇌부의 은폐 기도
이후 경찰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이 사건이 축소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게 된다. 해당 교도소에 고문경찰관 2명이 들어왔고,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물어보니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자신만 잡혔고, 자신들이 모두 뒤집어 쓰게 됐다고 하소연을 했다는 것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로부터 듣게 된다. 그리고 해당 내용을 휴지에 적어 외부로 전달을 하는데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해당 휴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됐고, 고문경찰관이 2명 이외에 3명이 더있다는 사실이 사제단 소속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드러났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지침 등을 통해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했지만 5월 22일 동아일보가 대서특필하면서 다른 언론사들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결국 전국적 분노가 일어나면서 전두환 정권은 급히 개각을 단행했지만 연세대학교 이한열 열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6.10 민주 항쟁이 발발하면서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