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31일 전두환 국보위 설치
[역사속 오늘리뷰] 5월 31일 전두환 국보위 설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5.31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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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0년 5월 31일은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국보위가 설치된 날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부의 실세를 모두 제거하면서 군부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후 1980년 5.17 내란 사건을 통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여야 정치인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 및 재야 세력을 모두 체포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군부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군인 신분이었기에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는 아직도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정에 개입할 근거가 없었다. 이에 박정희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었던 것을 차용해서 국보위를 5월 31일 설치하게 된 것이다. 명분은 “계엄업무를 지휘 감독함에 있어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한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바지사장으로 앉혀 놓고 자신들이 국정을 주무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국보위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실권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이 잡고 있었다. 이로써 신군부가 국정을 직접 개입하게 된 것이다. 국보위는 허수아비 최규하 대통령을 대통령직에 물러나게 만들었고, 8차 개헌을 통해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입법권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3월 총선이 치러지고 11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국보위 업무는 공식적으로 종료하게 된다. 하지만 11대 총선에서 민정당과 관제 야당 후보들만 출마를 했기 때문에 11대 국회는 국보위 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교가 될 정도로 군부독재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미 유신헌법을 통해 민주주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이 무너진 상태에서 허수아비 최규하 대통령을 내세웠으니 전두환 신군부 세상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무소불위의 권력 누려

국보위는 전두환 정권 탄생을 위해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공직자 숙정계획’이었다. 이에 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을 비롯한 2급 이상 공무원 243명을 포함해 공무원,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정부산하단체 등 각급 기관 127개 소속 임직원 8천601명을 강제 사퇴시켰다. 아울러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야당 실세에 대해서 손발을 완전히 묶어 버렸고, 정치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권탄압기구인 삼청교육대를 신설해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불만세력을 강제적으로 진압하게 했다. 언론은 K공작계획을 지시해 계획을 짰고, 언론통폐합을 실시해서 많은 언론사들이 사라지기도 했고, 언론인들은 해직돼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돼야 했다. 연예계 역시 상당한 바람이 불었는데 ‘연예인 사회정화운동’이라는 이름 아래에 이주일, 나훈아, 심수봉, 배삼룡, 이기동 등 24명의 연예인들이 출연금지 조치를 받았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우 사회정화운동으로 인해 산업이 크게 위축되게 됐다. 이로 인해 독수리 5형제, 하록선장, SF 서유기 스타징가(별나라 손오공), 우주전함 야마토(날으는 우주선 V호), UFO로보 그렌다이저 등 로봇물이 방영 금지 되고 명량물이 방영됐다. 종교계 특히 불교계의 탄압이 거셌는데 불교계 정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조계종의 인적 개편을 인위적으로 단행했다. 교육계는 과외 금지, 대학입시 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 등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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