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 통제하기 힘들어
감시는 늘어나고
이처럼 지방관리들이 쉬쉬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면서 이번에는 이웃끼리 서로 끊임없이 감시하게 만들었다. 결국 관리들이 영조에게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조실록 40년 7월 23일 “관에서 나오는 차사(差使)들을 대접하고 이웃집에서 술을 담그는가 살피느라 잇따른 소요 속에 벌벌 떨면서 여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박절하게 이웃집까지 똑같은 죄를 주는 형률은 법을 신중히 하고 후세에 끼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고 밝혔다. 이에 정언 박상로는 금주령 폐단을 10조 조항의 문답 형식으로 상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금주령 때문에 중범죄가 줄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다만 영조시대 때 풍년이 들면서 쌀의 가격 하락을 걱정할 정도가 됐다. 결국 영조의 금주령은 손자인 정조에 들어와서 폐지됐다. 정조 스스로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금주령이 폐지되면서 정조시대 들어와서 다양한 술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지방행정력 무너지면서
영조의 금주령이 앞서 언급한대로 중앙정부의 지방정부 통제권이 약화되게 만들었고, 오히려 지역 유지의 입김이 더욱 높아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19세기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영조와 정조 때 계속해서 암행어사를 파견했지만 통제가 더욱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방 고을수령과 지역 유지와의 짬짜미가 늘어나면서 지방 고을수령은 ‘돈벌이’ 수단이 되면서 매관매직으로 이어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