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
[역사속 오늘리뷰]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6.20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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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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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89년 6월 20일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있었던 날이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프랑스 혁명 발발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테니스 코트라고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테니스 코트’가 아니라 테니스와 비슷한 형태의 운동인 ‘죄드폼’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운동이 ‘테니스’이기에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1789년 열린 삼부회에서 표결방식에 불만을 품은 평민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그러자 루이16세는 회의장 폐쇄를 결정했다. 이에 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한 후 헌법제정을 목적으로 ‘국민의회’ 해산 거부를 서약한 사건이 바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재정난 겪던 루이16세

루이16세는 즉위하자마자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우선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해 미국을 대폭 지원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 경제는 악영향을 겪어야 했다. 사실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했던 이유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면 그 이후 프랑스가 미국을 프랑스 식민지화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전쟁 비용을 지원해야 했고, 막상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하자 프랑스와 비교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게 되면서 프랑스가 미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재정난을 겪으면서 공채발행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됐다. 여기에 물가 폭등 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하면서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결국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열었다. 여기에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초반부터 인원별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신분별 표결은 신분별로 1표만 행사하자는 것이다. 성직자와 귀족이 각각 1표를 행사하게 된다면 평민대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평민들의 세금증액안이 가결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파행이 이뤄졌다.

국민의회 결성

결국 평민대표들은 독자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하면서 6월 17일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그러면서 어떤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루이16세는 6월 19일 회의장을 폐쇄했다. 이에 그 다음날인 6월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코트 건물로 옮기고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했다. 그러자 루이16세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파리시민들은 국민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무장을 갖춘 후 대항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 시민의 권리선언 등을 내걸었고, 루이16세는 이를 거부하자 10월 5일 베르사유 행진으로 이어갔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판을 받고 1793년 1월 21일 처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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