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충무로
[역사속 경제리뷰] 충무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6.29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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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충무로라고 하면 지리상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상징이기도 한다. 이는 할리우드가 미국 영화산업의 상징인 것처럼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상징이 바로 ‘충무로’라고 할 수 있다. 충무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서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상징이었지만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점차 그 명성을 잃어버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충무로가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메카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경성부 진고개 부근에 송도좌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부터이다. 그리고 1910년 경성부 황금정(현 외환은행 본점)에 경성고등연예관이 들어서면서 충무로가 우리나라 영화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제2대정, 경성극장, 낭화관, 조일좌, 수좌(경성촬영소), 중앙관 등 충무로 일대에 극장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극장과 깡패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미관과 김두한이 대표적이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극장과 임화수와의 관계이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1950년대 말에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1954년 3월 31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국산 영화 입장세를 전면 면제했기 때문이다. 입장세란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의 장소 입장료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영화 관람료에 입장세가 붙기 시작한 것은 1938년이다. 시행 초기에는 5~10% 수준이었지만 세율이 점차 높아져 30% 수준을 유지했고, 해방 이후에는 60%까지 치솟았다. 일너 입장세는 한국 영화 산업 발전의 큰 장애요인이었고,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영화에는 계속해서 높은 입장세를 부과하고, 국산영화의 입장세는 면세했다.

깡패 중심으로 영화 산업 성장

이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는 한국 영화 산업의 비약적 성장을 가져왔다. 1955년 14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이었던 제작편수가 1958년 83편으로 늘었고, 1959년에는 111편을 제작했다. 이런 영화 제작 산업에 깡패가 개입된 경우가 있었다. 임화수나 이화룡 등이다. 깡패가 개입된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극장을 깡패가 관리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극장을 깡패가 관리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서 서울 지역 깡패와 연계되면서 영화 배급이 수월하게 이뤄졌다. 즉, 충무로 지역의 극장을 운영하던 임화수나 이화룡 등이 영화 제작에 손을 대면서 영화 제작과 영화 배급까지 겸할 수 있기 때문에 강패가 영화제작사를 운영하는 경우가 있었다.

5.16 쿠데타 이후

5.16 쿠데타 이후 임화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 이후에도 영화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고, 충무로 일대에는 극장들이 속속 들어서게 됐다. 단성사, 피카디리, 대한극장, 서울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등이 속속 등장한 것이다. 이러면서 현상소, 기획사, 인쇄소 등이 함께 번성을 하게 됐다. 또한 영화인들이 쓰는 소품을 운반하는 오토바이 가게들이 들어서게 됐고, 배우 지망생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기 위한 사진관이 들어섰으며, 영화 포스터, 홍보물 제작을 위한 출력실과 인쇄소가 충무로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기업 자본이 투입되면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겨나면서 충무로 영화산업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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