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재베 나선 유럽
유럽에 설탕이 유래가 된 것은 중세시대이다. 하지만 워낙 비쌌기 때문에 귀족들도 접하기 힘들어서 ‘후추’보다 더 비싼 작물이었다. 그러다가 대항해시대에 접어들었고, 플랜테이션 농법이 적용되면서 중남미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이뤄졌고, 이에 설탕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사냥해서 중남미에 수출해서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조 과정에 노동력을 투입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설탕을 유럽에 수출하고, 유럽에서 설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은 상인들은 다시 아프리카에 유럽산 물품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삼각무역을 하게 됐다. 초반에 설탕은 귀족들이 먹는 감미료였지만 설탕이 대량생산을 하게 됐고, 산업혁명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최상의 열량 식품이 됐다. 같은 돈으로 고기, 채소 등을 사서 먹는 것 보다 설탕을 사서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 열량 면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었다. 이에 산업혁명 시기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주린 배를 움켜지면서 설탕물을 마셨다.사탕무의 개발
설탕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된 것은 사탕수수 대신 사탕무가 개발됐다는 것이다. 사탕수수는 아열대 지방에서 재배를 해야 하지만 사탕무는 냉대기후나 온대기후 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했다. 1747년 프로이센 화학자 안드레아스 지기스문트 마르그라프가 현미경으로 사탕무 조각을 보던 중, 당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탕무를 통해 설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마르그라프의 제자이자 프로이센의 과학자였던 프란츠 카를 아샤르는 스승의 주장을 이어받아 직접 여러가지 사탕무 종자들을 키워보며 이 이론을 현실화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801년 설탕을 뽑아내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사탕무 공장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잿더미가 됐다.대륙봉쇄령에 의해
사탕무를 통해 설탕을 만드는 것에 주목을 했던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차원에서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즉, 대륙봉쇄령을 통해 영국의 경제를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인 것이다. 유럽 대륙 국가들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전면 금지를 시킨 것이다. 문제는 영국의 해상제국과 식민지들의 단결력이었고, 그에 반해 다른 유럽국가들의 단결력은 약했다. 무엇보다 대륙에 설탕의 수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유럽 대륙에게는 결정타였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여기에 유럽 대륙 상인들은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설탕을 수입해서 고가로 팔게 하면서 그에 따라 나폴레옹 1세는 더욱 위기에 놓이게 됐다. 결국 자충수가 되면서 나폴레옹 1세가 무너지게 됐다.사탕수수 대신 사탕무
이 과정 속에서 나폴레옹 1세는 설탕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되면서 결국 사탕무 재배에 눈을 돌리게 됐다. 그러면서 설탕을 만드는데 있어 사탕수수 대신 사탕무를 사용하게 됐다. 사탕무는 유럽 전역에서 재배가 가능하게 되면서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의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1세가 비록 사라지게 됐지만 유럽에서는 사탕무로 인한 설탕이 만들어지면서 가장 타격을 받은 나라가 브라질이었다. 원래 브라질은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유럽에서 더 이상 중남미에서 생산하는 설탕을 쳐다보지 않으면서 브라질이 다른 방안을 고민하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커피’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