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빙자한 도굴꾼, 가루베 지온
가루베 지온은 일제강점기 당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일본인 교사이자 고고학자이다. 하지만 명색이 고고학자이지만 ‘도굴꾼’이었다. 만약 가루베 지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백제의 역사가 온전히 우리에게 전수됐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가 가루베 지온의 도굴에 대해 제동을 걸 정도로 심했다. 가루베 지온은 일본에서 활동을 하다가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한반도로 넘어왔다. 이에 고구려 낙랑 유적을 탐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마추어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는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1927년 공주고등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는 평양과 경주 발굴에 집중하면서 백제 유적지 발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가루베 지온은 공주에서 멋대로 발굴조사를 할 수 있었다. 가루베 지온이 1933년까지 공주 일대 고문만 738기를 발굴했다. 하지만 말이 ‘발굴’이었지 도굴이었다. 그러다가 1933년 송산리 6호분 도굴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총독부는 가루베 지온에게 더 이상의 발굴은 안된다면서 제동을 가했다.백제 지역에서 유일하게 도굴 당하지 않은 무덤, 무령왕릉
가루베 지온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제동을 받게 된 계기는 송산리 고분군 중 6호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관리가 가루베 지온이 유물들을 가져가는 것을 이상하게 느껴서 가루베 지온에게 묻자 원래부터 이렇게 발굴했다고 발뺌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관리는 무단으로 유물을 반출했다면서 맹비난을 가했다. 이에 조선총독부가 가루베 지온의 발굴에 제동을 가했다. 현재 일본에 있는 백제 유물 대부분이 가루베 지온에 의해 빼돌려졌던 유물이고 가루베 소장품이라고 해서 현재도 소장돼 있다. 역사학자들은 가루베 지온이 아니었다면 백제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 만큼 명확하게 밝혀졌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백제의 역사가 다시 주목받게 된 계기는 박정희 정부 당시 무령왕릉의 발굴이다. 백제의 무덤 중에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백제의 무덤 중에 무령왕릉이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가루베 지온이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가루베 지온이 무령왕릉까지 발굴했다면 백제 지역에 있는 무덤들 모두 ‘주인 없는 무덤’이 됐을 것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