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7.14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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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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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89년 7월 14일은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탈취한 사건이 일너난 날이다.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바스티유 감독을 습격한 이유는 ‘양심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스티유 감옥에는 총과 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스스로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서 총과 탄약 등 무기를 탈취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 파탄 났던 루이16세

1789년 5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재정파탄을 막기 위해 세제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신분대표를 소집했고, 삼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삼부회에서는 표결 방식에 대한 불만이 부르주아로 퍼져나갔다. 그 이유는 신분별 표결방식 때문이다. 신분별 표결방식을 채택할 경우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대표가 협력하게 되면 2:1이 되기 때문이다. 즉, 세금 부담을 평민인 부르주아가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평민대표들이 자신은 국민을 대표한다면서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했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 어떤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탄압하려고 했다.

네케르 파면

가장 결정적인 것은 7월 11일 루이 16세가 재무 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다. 그리고 국경지역에 주둔했던 프랑스 정부군을 소환했다. 네케르 파면 소식과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부르주아들은 7월 12일 보훈병원으로 몰려가 자신의 방위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무기와 탄약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보훈병원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는 양심수가 한 명도 없었다. 혹자는 양심수 석방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다고 하는데 양심수 석방이 아니라 총과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바스티유 감옥을 지키고 있었던 군사는 80여명이었기 때문에 1천여명의 군중을 감당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무기 인도 거부했던 지휘관

지휘관은 처음에는 대표 3명을 불러 식사 제공을 하면서 예우했지만 무기 인도는 거절했다. 그러자 민중은 더욱 흥분했고, 2명의 남자가 담을 넘어 침입했고, 사령부 안마당으로 통하는 도개교를 내렸다. 그러자 군중이 밀려들어왔고, 겁 먹은 수비병은 발포하면서 민중과 수비병이 충돌했다. 이에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감옥에 투옥됐던 7명의 죄수가 석방됐고, 바스티유 감옥은 함락됐다. 이때 사망자 98명, 부상자 73명이 나왔다. 수비대는 사망자 1명, 부상자 3명이었다. 지휘관은 군중에 의해 끌려 나왔고, 시민 대표는 지휘관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흥분한 군중을 달래기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목이 잘렸다. 결국 루이16세는 군대의 파리 철수와 네케르 복직을 결정했고, 부르주아 민병대인 국민방위대를 승인했다. 이후 프랑스 각 도시에서 부르주아로 구성된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어, 시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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