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군의 악행
조선시대에도 개차반이 있었다. 바로 선조의 두 아들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이다. 임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화군과 더불어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임해군은 순화군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온갖 패악을 저질렀고, 이에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만났지만 워낙 개차반 왕자라고 생각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결국 포로 협상을 했고, 풀려났다. 가토 기요마사 입장에서는 개차반 왕자를 포로로 붙잡아 두는 것 자체가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포로 협상에 응한 것이다. 임해군은 포로에서 풀려난 후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 폭행,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 공물 약탈 등이 있었다. 무엇보다 첩실을 빼앗기 위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했다. 이에 신하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고, 선조는 임해군을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발뺌을 했다. 선조는 결국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감쌌고, 유희서 아들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형을 처했다. 임해군이 이후에도 계속 패악질을 하면서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는 임해군을 두둔했다. 하지만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신하들은 임해군을 처단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고, 결국 옥사됐다. 나중에 인조반정이 발생했지만 폐모살제에서 임해군은 빠졌다. 그만큼 임해군 패악질에 신하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순화군의 패악질
선조의 아들에는 순화군이 있었는데 순화군 역시 패악질이 심했다. 어릴 때부터 순화군은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다고 선조는 회상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임해군과 더불어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잡혔지만 패악질로 인해 가토 기요마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 패악질은 더욱 심해졌다. 황해도 신계군에 머물렀을 때는 10대 중반 미성년자였다.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질러서 대신들이 삭탈관직해야 한다고 상소를 선조에게 올렸을 정도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원손 탄생 축하 대사령으로 살아났지만 4달도 안돼 사람을 때려 죽이는 사고를 쳤다. 이후로도 매년 사람을 10명 가까이 죽이는 학살범이 된다. 오죽하면 패악질 일삼았던 임해군도 행실을 꾸짖기까지 했다. 임해군의 패악질은 주로 부유층이나 권력층에 집중했다면 순화군의 패악질은 주로 가난한 사람, 힘없는 하인, 평민, 천민에 집중됐다. 결국 1600년 순화군이 궁녀에게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 결국 선조는 처벌을 지시했다. 곤장 80대에 유배형이 내려졌다. 순화군이 수원부로 쫓겨났지만 해당 지역에서도 왕자를 내세워 위세를 부렸다. 선조는 결국 유리안치를 지시했다. 그러나 순화군은 금부도사를 두들겨 패고, 울타리를 직접 열고 활보했다. 순화군은 서인으로 강등되고,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패악질은 여전히 이어졌다. 결국 선조는 순화군을 가택연금 했다. 가택연금 할 때는 바깥에서 자물쇠로 채우게 했다. 이후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후 ‘풍병을 앓았’지만 선조는 별다른 후속 치료를 하지 않았다. 결국 순화군은 26세에 사망을 한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