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풍미했던 홍콩영화
홍콩영화는 1980년대 엄청난 전성기를 만들었다. 한해에 100여편 이상 제작될 정도로 호황을 맞이했다. 이는 1960~70년대부터 쌓아온 노하우, 인력, 인프라가 있었고, 선진국 영화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당시 동아시아에는 독재국가가 들어섰기 때문에 자유로운 창작이 어려웠다. 우리나라만 해도 전두환 정권이었기 때문에 영화 창작의 자유가 없었다. 반면 홍콩은 영국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다. 홍콩영화는 이소룡 이후 두각을 나타내면서 중화권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콩 영화에 자본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에 소재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 고전 판타지 장르인 ‘천녀유혼’이나 코미디물인 ‘최가박당’ 등이 나왔다. 아울러 주윤발, 유덕화, 양조위, 장국영 등을 중심으로 홍콩 느와르가 나오면서 ‘영웅본색’ 등의 영화가 만들어졌다.갑자기 몰락한 이유
그런 홍콩 영화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단순히 중국에 반환된다는 이유로 몰락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배우들의 지나친 겹치기 출연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주윤발, 장국영, 장만옥 등이 일년에 4~5편 많게는 10여편 가까이 다작을 했다. 그러다보니 연기에 성의가 없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그에 따라 관객들이 외면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 아류작이 난립했다는 것이다. 영웅본색이 히트하자 비슷한 홍콩 느와르물이 쏟아져 나왔고, 천녀유혼이 히트를 치자 역시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쏟아졌다. 도박 영화가 성공하면 도박 영화들이, 강시 영화가 히트 치면 강시 영화가 나왔다. 여기에 ‘원조 배우’들 역시 아류작에도 출연을 하면서 ‘원작’과 ‘아류작’이 헷갈리게 되는 상황이 됐다. 아울러 삼합회 등 조직폭력배가 영화 산업에 개입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투자 감소
하지만 이것은 부수적인 원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의 감소이다. 1980년대 홍콩에 투자 자금이 몰린 것은 중국으로 가는 자금의 경유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가면서 해외자본이 직접 중국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됐다. 즉, 중국으로 자금이 가기 위해서는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홍콩을 통해서 이뤄졌지만 이제는 직접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홍콩이 매력적인 도시가 되지 않았다. 홍콩으로의 투자금 감소는 홍콩 영화 산업에 상당한 위기를 보이게 되면서 영화 제작사들은 삼합회 등 조직폭력배 자금을 끌어안게 됐다.한국 시장의 축소
홍콩의 인구는 750만명이다. 즉, 홍콩영화가 시장에서 소비하기에는 홍콩 자체의 인구가 협소하다. 이런 이유로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홍콩 영화들이 제작해왔다. 그리고 가장 큰 시장은 ‘우리나라’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홍콩 영화는 한국시장이 가장 큰 주요 고객이 됐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우리나라 극장 문을 두들겼지만 한국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영화 산업이 죽을 것이라면서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다보니 직배사들은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은 홍콩영화를 직수입하게 됐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고도 경제 성장으로 인해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직수입이 이뤄졌고, 상대적으로 한국영화 자체도 점차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화인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즉, 더 이상 홍콩영화를 즐겨보는 세대가 아니게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