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1천300만엔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했고, 백성의 큰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발빠르게 전개해 나갔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과 많이 닮았다.
러일전쟁 직후에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에 넘어가게 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침탈에 나섰다.
그러면서 일본은 대한제국 화폐발행권을 박탈하고, 전환국을 폐쇄했다. 사실상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의 경제권에 예속시켜나갔다.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차관을 도입시켰고, 그 액수가 1천300만엔에 육박했다. 문제는 대한제국 재정이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 1년 총수입의 1/3 이하로 떨어졌다. 재정이 악화되면서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한 독자 투고가 실리게 됐다. 그것은 국채 1천300만엔을 우리 손으로 갚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호응을 얻으면서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에서 나서기 시작했고, 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호라동을 벌여나갔다.
무엇보다 부녀자 계층들의 참여가 상당히 높았고, 특히 기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많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하층민들도 참여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양반을 비롯해서 하층민까지 퍼져 나갔다. 의연금을 의연소로 옮기던 도중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떼들이 국채 보상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훔치지 않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털어 국채 보상운동에 보탬이 되게 했다.
마침내 고종 황제 역시 담배를 끊고 운동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면서 금연운동이 일어났고, 1908년 약 80만엔 정도의 거액이 모이게 됐다.
돈 횡령 소문 퍼뜨려
일본 입장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못 마땅하기 때문에 친일단체 일진회를 동원해서 횡령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인물인 양기탁을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다만 물증이 없기 때문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큰 타격을 입히기는 충분했다.
이런 이유로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대한제국의 경제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만약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해서 1천300만엔을 모두 갚았다고 해도 일본은 또 다시 대한제국 조정을 압박해서 차관을 끌어다 쓰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초반에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채보상운동이 ‘항일 투쟁’ 형식을 띄기 시작하면서 그에 따라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