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얄타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인했다면 얄타회담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독일 제국이 항복을 하면서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제국이었다. 일본 제국은 카미카제 등과 더불어 ‘옥쇄작전’을 구사하면서 마지막 저항을 했다. 그러자 연합군은 ‘몰락작전’을 계획했다. 몰락작전은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사 전력을 일본 본토에 그대로 상륙시켜서 일본 열도를 광범위하게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다. 그것은 1945년 8월 18일 광복군을 서울에 투입해서 일본 제국을 몰아내고 서울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을 했다. 어쨌든 일본 제국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저항을 하자 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결국 포츠담에서 회담을 갖고 일본 제국을 향해 무조건 항복할 것을 선언했다.콧방귀 뀌었던 일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 콧방귀를 뀌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은 항복을 하는 조건으로 ‘천황제’를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연합군에서는 천황제 유지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일본 제국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몰락작전을 구사해서 일본 제국을 완전히 멸망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당시 연합군 전력과 일본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연합군의 희생은 미미하겠지만 일본 국민 전체가 희생돼야 하는 수준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결국 히로시마·나가사키 등 대도시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일단 겁을 주고, 그에 따라 항복을 받는 것으로 전환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확실히 일본 제국의 전쟁 의지가 확 꺾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군부 내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해야 한다 혹은 옥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군부 쿠데타인 궁정사건이 8월 14~15일 사이에 벌어졌다. 만약 성공했다면 연합군은 몰락작전을 구사했을 것이고, 임시정부 광복군이 서울진공작전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를 하면서 결국 히로히토 국왕은 옥음방송을 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