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거치면서
삼부회의 출발은 1302년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겪던 필리프 4세가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때 각 지역 영주, 성직자 그리고 부르주아 대표자들로 삼부회를 만들었다. 삼부회는 징세에 동의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국왕 자문기구 형식으로 출발했다.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징세의 대가로 자신의 영지에 속한 농노에 대한 지배권의 강화를 꾀하려고 했고, 부르주아들은 경제적 특권을 부여받고자 했다. 다만 왕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삼부회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그러다다 다시 삼부회가 주목을 받은 것은 백년전쟁 시기였다. 1325년 2차 삼부회에서 남부와 북부 대표들은 합심해서 장 2세로부터 새로운 세금의 과세 시에 삼부회 협의를 거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듬해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 포로가 되면서 왕자 샤를 5세는 부왕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1357년 3차 삼부회를 열었다.납세동의권, 왕에게 넘겨줬다가
이때 부르주아 계급 대표는 대조례를 제안했고, 삼부회에서 통과됐다. 샤롤 5세는 삼부회에 재정통제권을 넘겨준 것이다. 하지만 삼부회는 분열했고, 자크리의 난 당시 에티엔이 농민군과 접촉하자 위기를 느낀 귀족들이 국왕 밑으로 집결했고, 부르주아 내부에서도 에티엔이 너무 나갔다고 여기면서 납세 동의권을 왕에게 반납했다. 1484년 삼부회는 국왕에게 납세 동의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무시했고, 삼부회는 유명무실해졌다.미국 남북전쟁 이후
17세기 프랑스는 절대왕조가 들어서면서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태양왕 루이14세는 수많은 전쟁을 했지만 그로 인해 프랑스 재정은 고갈을 넘어 수많은 부채를 떠안아야 했다. 더욱이 루이16세는 미국 독립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면서 재정은 더욱 악화됐다. 이런 악화된 재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된다. 하지만 삼부회에서 성직자와 귀족은 각각 계급을 대표하는 것을 1표로 했다. 성직자와 귀족은 한 편으로 부르주아와 대항했기 때문에 표결은 2:1로 해보나 마나였다. 당연히 숫자가 더 많은 부르주아는 계급별이 아니라 참석한 인원수로 표결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성직자와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6월 18일 제3신분인 부르주아는 자신을 동조하는 성직자와 귀족 일부와 함께 삼부회를 박차고 나와 국민의회를 설치했다. 당황한 루이16세는 무력으로 국민회의를 해산하려고 했고, 테니스 코트에서 부르주아는 국민회의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루이16세는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자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