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의 후폭풍
당시 임오군란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었다. 일본제국은 임오군란 때의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파견하고 육해군의 시위 아래 제물포에 상륙했다. 일본의 출병 소식에 긴장한 청나라는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일본 공사를 자중시키는 것은 물론 조선 정부에게 제물포 조약을 맺게 했다. 제불포 조약의 핵심 내용은 조선 측의 5만원 배상, 일본 공사관의 일본 경비병 주둔,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 위한 수신사 파견 등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게 됐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하게 됐다.경제적 침략의 계기 마련
특히 일본에 대한 배상은 일본으로부터 외채를 빌려 차입해 중당 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강타할 수 있는 미끼를 던져주게 된 것이다. 차입으로 일본에 대한 배상을 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채권 채무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조선에 있는 광물자원 등을 담보로 또 다시 대출을 하는 등 경제적 침탈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뿐만 아니라 공사관 경비 미명 아래 일본군이 조선 땅으로 건너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일본은 훗날 경복궁 침탈 사건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을 일으켰다.개화파가 친일파로
제물포 조약의 규정에 따라 사과 사절로 박영효, 김만식 등을 수신사로, 홍영식, 사광범 등이 수행원으로, 군왕의 밀명을 띤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이 일본으로 갔다. 이때 체제 비용 전액을 일본 외무성이 감당했으며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르는 해박한 근대 지식을 조선 청년들에게 전파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결국 친일 성향으로 돌아섰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했고, 이것이 갑신정변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