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9.01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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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23년 9월 1일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관동대학살이 시작된 날이다. 대략 3~4주 걸쳐 이뤄진 학살이다. 당시 일본에 존재하던 조선인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 우익들이 재난을 틈타 조선인을 대상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학살한 사건이다. 재난에 따른 정치·사회적 불만도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 등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마침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면서 가장 경제적 혜택을 많이 입었다. 그 이유는 유럽은 전쟁의 화마로 인해 제품 생산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연합국 입장에서 소비재 생산을 담당하는 나라가 미국과 일본 등이었다. 이에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고도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유럽에 평화가 오면서 그에 따라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제품 생산이 이뤄졌다. 이는 일본 제품이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제품의 품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제품 생산을 담당할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제품을 유럽 사람들이 사용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일본 제품이 필요 없게 됐고, 그에 따라 일본은 경제 침체기가 찾아왔다. 그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상당히 높아졌다.

관동대지진 발생

사회적 불만은 노조의 파업이나 쟁의 등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1920년대 집회와 시위가 많이 발생했다. 여기에 조선인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1919년 3.1 만세운동을 통해 번져 나갔다. 이는 일본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그 사회적 불만이 표출되는 계기가 됐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혼란스러웠다.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내무성이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은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신문이 인용을 하면서 일본인 사이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변했다는 유언비어였다. 여기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히려 일본 정부로 하여금 계엄령을 선포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즉,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와 결탁해서 일본인들을 학살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모두 척결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조선인과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 모두를 척결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학살하는 일본인에 대해 방관자 자세를 취했다. 실제로 경찰서로 조선인들이 피신을 했지만 경찰이 보호를 해주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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