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국유화 조치 반발로
청나라가 서태후의 공백이 생기면서 황실을 사수해야 한다는 수구파와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헌파, 민주공화정으로 나가야 한다는 혁명파 등이 우후죽순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철도 국유화 조치가 내려졌다. 철도를 국유화한 것은 이를 바탕으로 차관을 외국에서 끌어다 쓰기 위해서이다. 당시 중국 철도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부설됐는데 철도가 돈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 중국 중앙정부는 철도국유화를 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외자 즉 차관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각 지방에서 민간자본을 통한 철도 부설이 일어나면서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철도 국유화 조치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재산이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에 각 지방 민간자본가들은 당연히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이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쑨원은 청나라 백성 89%가 사실상 농노비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해서 이들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이것이 합쳐지면서 철도 국유화 반대 시위와 농노비 해방운동이 벌어지면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쑨원의 중화민국
청나라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북양군벌을 거느린 위안스카이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당시 위안스카이는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고, 양쯔강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이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혁명군의 남부와 북양군벌의 북부의 화해 즉 남북의화가 성립됐다. 그러면서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리고 12월 29일 쑨원이 중화민국 대총통에 선출됐고, 1912년 중화민국 원년이 됐다. 이런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황실을 압박했고, 공화정 수립을 요구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압박에 의해 청나라는 멸망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