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푸에블로호가 1968년 1월 23일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의 공격을 받고 강제 납포당한 사건이다.
승조원 83명 중에서 나포 도중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82명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훗날 미국으로 송환됐다. 해당 사건이 한국사에서 주요한 변곡점을 맞이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해 침범이었는지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수행을 하던 중 북한 영해를 침범했는지 여부는 북한과 미국의 주장이 각각 다르다.
푸에블로호의 주요 임무는 정탐행위이고, 이를 통해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만 당시 북한 해군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나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초계정 4척으로 푸에블로호를 사방에서 포위를 했다. 여기에 미국 전투기가 구출하러 올 것이라고 판단해 전투기까지 출동했다.
나포 직전 1.21 사태가 발생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미국은 해군 기동함대와 공군 전포기를 한반도 주변에 전개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질이 나포됐기 때문에 섣부르게 행동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펼칠 경우 전선이 두 군데로 늘어나게 된다.
결국 미국은 억류된 승조원의 석방을 두고 오랜 시간 협상을 했다. 그리고 합의를 했는데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미국이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고,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았다.
사건의 후폭풍은 어마어마
미국이 이처럼 저자세 대북 외교를 펼치면서 북한은 자신감을 얻었고, 이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일으켰다.
여기에 북한은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선언하면서 국가 예산 절반을 국방비에 쓰기 시작했다. 다만 이것이 북한 경제 몰락의 서막이 됐다. 북한 경제가 이때부터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는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갖는 충격은 상당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저자세 외교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에 파병을 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린든 존슨 대통령과의 관계도 좋았다.
하지만 해당 사건의 계기로 미국이 북한과의 사이가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겨났다.
여기에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계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주요 우방 대통령’에서 ‘제3세계 독재자’가 됐다. 미국이 더 이상 대한민국을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까지 단행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