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했지만
1987년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연매출은 10조원 대였고, 라이벌이었던 현대그룹에게 재계 1위 자리를 내어줬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취임사에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1년 뒤인 1988년부터 흑자 전환이 됐고, 1990년대 반도체 메모리부분 1위를 탈호나하면서 산방을 햇다. 문제는 모든 사업이 제자리걸음이었고, 점유율은 경쟁 업체에 조금씩 빼앗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업부 간의 독자적 운용이 강하면서 부서 간 조정이 어려웠고, 경쟁이 지나쳤다. 해외법인은 한국 본사의 결정에 의존하면서 유연한 대처와 자율성이 사라졌다. 그것은 사장에 치중된 권한이 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술통합과 기능별 전문화가 어려웠다. 하지만 매출은 선방하고, 흑자도 전환하면서 임원들은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무조건 많이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휴대폰에 불량률이 상당히 높았다. 이건희 회장은 이를 주목했고, 1993년 유럽 출장길에 비행기 안에서 보고서를 읽었다. 그것이 1989년부터 삼성전자 디자인고문으로 일했던 일본인 후쿠다 다미오 보고서였다.후쿠다 보고서에 충격 받은 이건희
후쿠다 보고서를 읽은 이건희 회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보고서 내용은 ‘삼성은 일본 기업 배끼기에 급급했다’는 것과 ‘자기들이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창조적인 도전을 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삼성의 디자인은 어디서 본 것 같기 때문에 세계시장에서 이길 수 없으며, 삼성은 이류고 절대로 일류기업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이건희 회장은 ‘초일류’를 내걸었지만 삼성의 조직은 ‘이류조직’이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충격에 빠지게 됐고, 그것은 결국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바꿔라”는 것이었다. 당시 임원 중에는 이런 극단적인 개혁에 반대를 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고수했다. 그러면서 삼성의 로고도 바꾸고, 휴대폰 화형식도 개최하는 등 개혁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노력 덕분에 삼성은 ‘애니콜’ 신화를 필두로 ‘갤럭시’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