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돼서 사학 설립
임시정부는 1941년 당시 해방 이후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교육 정책이 들어있다. 핵심은 국비의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에 인구와 교통 등 형편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대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에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도부로 하는 ‘기성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대학설립 기금 마련에 앞장 섰고, 우여곡절 끝에 ‘보인상업학교’ 건물을 빌려서 학생들을 모집하고 대학을 설립했다. 1946년 9월 1일 보인상업학교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개교식을 거행했고, 학교 명칭은 ‘국민대학관’으로 했다.국민대학과의 결별
다만 우여곡절 끝에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결별을 하면서 국민대학과 결별을 해서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독자ㅈ거으로 추진하게 됐다. 이에 조희재 여사가 국민대학에 기증하기로 한 5만평의 토지를 취소했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학과 결별을 하면서 조희재 여사 역시 국민대학과 결별을 했고, 이에 단국대학교 설립이 빠른 속도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학교 이름을 ‘단국’으로 결정됐다.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은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고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단국’으로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의 통일국가 추진에 대한 이념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