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 출현으로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12.12 군사반란을 거치면서 전두환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계엄포고령에 따라 모든 언론보도를 검열했고, 이를 위해 1980년 2월 보안사 정보처에 언론반을 신설했다. 언론반에서는 K공작계획으로 언런인을 회유하고 언론사 논조를 민주화 여론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을 하려고 했던 핵심은 바로 ‘정통성 없는 신군부’에 대한 언론의 저항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성장해온 언론사 입장에서 전두환 신군부는 갑자기 나타난 정부였고, 오히려 1980년 서울의 봄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에서 탄압을 받던 언론사로서는 서울의 봄을 지지함으로써 언론의 자유화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이에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의 자유화에 대한 기대를 꺾어 버려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고, 이에 언론통폐합 카드를 꺼내들었다.언론통폐합과 강제해직
1980년 11월 14일 한국방송협회, 신문협회 등은 총회를 열고, 방송, 신문 통합 등 소위 ‘대한민국 언론의 개혁’을 골자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발의했다. 이에 중앙지 신문은 7개에서 6개로, 지방지 신문도 14개에서 10개로 줄었다. 언론통폐합과 더불어 언론인 강제해직도 이뤄졌다. KBS로 간 인원은 TBC 681명, DBS 139명, CBS 106명 등 모두 1천105명이었다. 이들 중 2백명은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1980년 1월 당시 언론 종사자 수는 1만 8천730명인 반면 탄압 뒤인 1981년에는 1만 6천786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두환 정부는 그에도 모자라서 계속해서 언론인들에게 세뇌를 했고, 전두환 정부에 우호적인 언론인조차도 전두환 정부의 언론인 세뇌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언론통폐합의 후폭풍
언론통폐합의 후폭풍은 언론의 독과점 현상이 심화됐다. 이미 박정희 정권 때부터 언론의 독과점 현상이 있었지만 언론통폐합을 통해 그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다. 독과점으로 흐른 언론사들은 정권에 순응하게 되면 살아남는 것은 물론 언론사가 비대해지는 경향이 되면서 언론사들은 더욱 전두환 정권에 순응하게 됐다. 이로 인해 언론의 독과점 현상은 기자의 특권화로 이어졌다. 각종 특권을 행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의 명분으로 ‘방송공영화’를 내세웠는데 결국 공영화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시민사회에 형성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소맥’으로 불리는 폭탄주가 해직된 언론인들이 ‘통폐합주’라고 이름을 짓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