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했던 시민들
등화관제훈련은 1977년 12월 2일 밤 9시 40분부터 시작했다. 서울 시내 주요 건물은 불을 꺼야 했고, 자동차의 시동도 꺼야 했다. 전기를 공급하는 한국전력공사의 건물도 불을 꺼야 했다. 시민들은 70분간 이동이 통제됐다. 더욱이 당시에는 통행금지시간도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일분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극심한 교통난에 휩싸였다. 이에 정부는 통행금지 시간을 새벽 1시까지 늘려 인파를 분산시키려고 했다. 아예 어떤 기업은 1시간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일찍 퇴근을 해서 놀아주니 좋았고, 아버지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은하수를 구경하기도 했다.도대체 왜 등화관제 훈련 해야 하나
등화관제훈련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긴 것은 1976년이었다. 당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됐다. 그러면서 북한이 등화관제 훈련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해 10월 14일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 서울시 강북 일대 UFO가 출몰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스웨스트 항공의 보잉 707(902호편) 화물 전세기 1대가 청와대 상공을 침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공포를 마구잡이로 쏘아대면서 유탄에 시민 1명이 사망하고, 31명이 부상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에 등화관제 훈련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아울러 10월 유신 이후 제4공화국이 출현하면서 시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면서 막걸리 보안법 등이 출현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런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등화관제 훈련 등이 필요했다. 이는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1990년 폐지된 이유는
등화관제훈련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의 경우 아예 관리사무소가 일제히 정전을 했다. 그러다보니 집안에서 전기를 아예 사용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불편이 가중됐고, 일부 주민들은 초를 켜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화재로 연결되면서 새명과 재산의 위협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등화관제 훈련이 폐지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결국 1990년 폐지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