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착순으로 숙소 배정하는 공립 알베르게, 새벽길을 나서
- 완주까지 100km를 알리는 비석 앞에 모여둔 순례자들과 자축
- 동고동락했던 순례자길 친구들로부터 날아든 ‘완주’ 소식과 응원 메시지에 울컥하기도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뜨겁고도 찬란했던 사리아(Sarria)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오늘은 포르토마린(Portomarin)으로 향하는 날이다. 어느덧 32일 차 순례에 접어들었고, 프랑스 길에서 사리아를 지났다는 것은 순례길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칠 순 없다. 이제부터 순례길 ‘숙소 대란 현실’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례길 숙소 대란이 시작되다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까지는 23km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전날 숙소 예약을 위해 포르토마린의 모든 사립 알베르게에 전화했을 때, 단 한 침대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와 일행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바로 선착순 공립 알베르게. 대부분 공립 알베르게는 오후 1시에 문을 열고 선착순으로 순례자를 받다가, 인원이 다 차면 문을 닫곤 한다.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이니, 선착순에 들기 위해선 남들보다 일찍 순례를 시작해야 했고, 그렇게 부랴부랴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니 작은 산길이 펼쳐졌다. 순례길에선 피레네산맥을 제외하곤 작은 언덕들을 가진 산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높진 않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백 번 반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날은 언덕에 대한 피로감이 유독 심해 이런저런 회의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굳이 내려가야 할 길을 왜 올라야 하며, 그저 평지로만 순례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순례길 초반에 만났던 티모 아저씨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순례길은 우리 삶과 참 비슷한 점이 많기에, 이곳에서 만나는 오르막, 내리막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을 거라 하셨다. 아저씨가 해준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스스로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래, 차근차근 올랐다가 안전하게 내려가면 되는 거야, 평지만 걸으면 재미없잖아.’
산티아고 순례길, 드디어 100km 비석을 만나다
그렇게 2시간쯤 걸었을까, 멀리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 보니, 완주까지 100km가 남았다는 걸 알려주는 비석이 있었고, 그 근처로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나도 너무 신이 나 사진을 여러 장 남겼고, 자리에 있던 순례자들과 자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초연해지는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시원섭섭한 마음,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나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모순적인 마음 등 복합적인 감정이 드리웠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 또한 순례의 일부일 테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나온 길을 잘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리바디소(Ribadiso)로 향하는 34일 차 구간을 걸으며, 그간 만나온 순례자 친구들로부터 완주했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피레네산맥을 넘은 뒤, 기절 직전이었던 나를 도와준 파블로, 한동안 함께 걸으며 동고동락했던 아우, 부르고스에서 야무지게 한식을 먹던 레오 등 모두 완주에 성공해 산티아고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들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자랑스러웠고, 나도 끝까지 잘 해내길 바란다는 친구들의 응원에 괜스레 울컥하기도 했다.
그간 이 길에서 수많은 순례자와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눴다. 그들과 동고동락한 시간을 내 삶에서 셈해 본다면 찰나의 시간이겠지만, 그 깊이와 가치는 감히 셈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응원해 준 당신을 나 또한 매우 응원했고, 카미노가 당신의 삶에 축복이었길 바란다는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낸 뒤, 그렇게 나는 다시 나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