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순례길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 서적,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
- 하루 34km 걸으며, 어렴풋이 그려본 나만의 빛을 보다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아스트로가(Astroga)로 향하는 23일 차 순례길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유독 덥고 습도가 높아 그리 멀지 않은 여정이었음에도,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순례자들은 걸을 때 저마다 본인이 힘들어하는 시간, 날씨, 혹은 구간 등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도착하기 2시간 전에 가장 피로감을 느끼곤 했다. 이날도 목적지까지 약 7km 정도 남겨두고 육체적, 정신적 고비가 찾아왔고, 그렇게 혼을 빼고 걷고 있을 때쯤, 생각지도 못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됐다.
그 오아시스는 바로 ‘기부제 쉼터’였다. 이 쉼터는 말 그대로 순례길 위 무인으로 운영되는 간이매점인데, 각종 과일뿐만 아니라, 우유, 커피, 물, 달걀 등 순례자들을 위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다.
나도 바나나와 복숭아를 하나씩 먹으며 달콤한 휴식을 취한 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부하고 떠났다. 유난히 힘들고 무더웠던 날이었지만, 이름 모를 카미노 천사가 준비해 준 작은 쉼터 덕분에,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정비하고 아스트로가까지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황홀한 경험을 선사해 준 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
7유로짜리 아스트로가 공립 알베르게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은 내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로 향했다. 내가 이토록 그 마을에 묵고 싶었던 이유는 올해 초 읽었던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라는 책 때문이었다.
라바날 델 카미노 수도원으로 파견된 한국인 최초 선교 사제가 쓴 책인데, 약 5년간 이곳에서 봉사하며 만난 순례자들과의 일화, 또 직접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고찰이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삶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던 터라, 신부님의 이야기는 내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곧 두 번째 순례길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을에 도착해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한 한국인 남자분이 숙소 주인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말 하는 걸 듣고는 다가와 스페인어로 통역도 해 주고, 알베르게 체크인을 도와주기도 했다. 덧붙여 본인은 이곳에 새로 파견된 선교 사제인데, 오후에 성당에서 한국어 미사가 있으니 기회 되면 참석해 보라는 안내도 해주었다.
짐을 풀고 알베르게에서 판매하는 라면 세트(라면+김치+밥)를 든든히 먹고 나서, 나는 곧장 성당으로 향했다. 미사는 외국인 순례자 7명, 한국인 4명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이자 한국어 기도문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 화답송 및 기도문을 나 홀로 읊게 되었다.
처음엔 행여나 기도문을 틀리거나 버벅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너무 긴장됐지만, 이런 소중한 경험을 또 언제 해볼지 싶어 누구보다 집중하며 미사를 드렸다.
미사 강론 중,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 빛이 이동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빛을 따라서, 찾아서,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빛을 찾는 여정입니다. 이 길의 끝에서 여러분의 빛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내 두 번째 순례길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이날 이후론 성취감에 취해 걷는 것 보다 나만의 빛을 찾는 데 집중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빛이 되어주겠다는 다짐을 해보며 오늘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하루 5만 보를 걷고 나서 내가 느낀 것
다음 날 아침, 폰페라다(Ponferrada)로 향하는 여정은 가파른 내리막으로 악명 높은 구간이다. 전날 신부님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조심히 내려가라고 하셨을 정도이니… 그렇게 잔뜩 겁을 먹은 채, 25일 차 순례를 시작했다.
역시나 소문대로 끝없는 내리막이 세 시간 동안 펼쳐졌고, 그 경사도 또한 매우 가팔라서 멀미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그 길목의 풍광은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워 순례자들 모두 거친 숨을 내쉬곤 있었지만,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폰페라다에 도착해 걸음 수를 확인하니, 약 5만 보, 총 34km를 걸었다. 사실 중간에 멈춰 이날의 순례를 마무리할까 싶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남아있는 카미노 고전 루트 일정에선 이렇게 오래 걸을 만한 날이 더 이상 없기에, 마지막으로 순례길에서 나의 체력적, 정신적 한계를 겪어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34km를 걸은 가치는 너무나 충분했고, 내가 쫓는 빛은 궁극적으로 어떤 모양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그려보기도 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